[무비053] ‘조의봉투’ & ‘돌고래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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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가쟁명’으로 쏟아지며 명멸하는 영화들

수도권에 집중된 정규 영화학과가 소재하지 않았던 지역에서도 이제는 지역 영상미디어센터나 독립영화단체들이 주관하는 제작 워크숍이나 여타 교육과정 개설을 통해 기본적인 영화 제작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경로가 넓혀진 상황이다. 여기에다 비록 총량적으로는 너무나 부족하나마 제한적으로 확대된 제작지원사업 덕분에 영화 제작의 문턱은 나날이 낮아지는 중이다. 장비가 필요하다면 대여할 수 있고, 최소경비도 비록 턱없이 모자라지만 종잣돈 정도는 구할 가능성이 생겼다. 교육과정에서 만난 수강생들은 영화 ‘동지’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런 조합을 통해 적지 않은 숫자의 단편 영화들이 지역에서도 탄생하고 있다.

이런 교육과정은 대개 결과물로 실습작을 요구한다. 정규 영화학과는 물론 영상과 미디어 관련 종사 인력을 배출하는 대학 관련 학과가 2023년 기준으로 155개, 여기에서 양산되는 워크숍 제출작업만 학과당 40편이 평균이라 하니 그야말로 대학에서만 6천 편의 ‘영화’ 형태를 갖춘 무언가가 찍어나오는 셈이다. 게다가 통계에 잡히지 않는 민관 기타 교육과정, 혹은 완전히 개별적으로 제작되어 외장 하드, 혹은 유튜브 한구석에만 존재하다 소멸하는 동류가 얼마나 많을까? 집계를 포기하는 게 현명해 보인다. 몇 년 사이에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 전부를 파악하기도 힘들어진 상태란 것만 봐도 명확한 추세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들은 대부분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만다. ‘영화제’라는 검단자에 의해 선택되고 초청받지 못하면 십중팔구, 아니 1%의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하면 전국 어디나 겪게 될 미래다. 하지만 그중 재능을 개화만발하게 된, 또는 적절한 타이밍을 만나게 된다면 그런 미약한 첫 출발은 일정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도 한다. 그러하기에 기성 작가의 작업보다는 좀 더 유하게, 보다 너그럽게 마치 모종을 키우듯 ‘인큐베이팅’하는 건 필수전제가 되어야 한다. 첫 출발이니까.

이제 소개할 2편의 단편영화는 지역 바깥에선 거의 알려지지 못한 미완의 작업에 가깝다. 아마 지역 내에서도 영화를 만든 이들과 친분이 있거나 지역 독립영화에 상당한 연대감을 지닌 이들이 아니라면 해당 작품의 존재를 모를 이들이 태반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들을 만든 2명의 감독은 첫 작업 전후로 지역 영화인의 산실인 대구영화학교 과정에 나란히 참여한 후, 데뷔작품에서 설정한 큰 좌표에 따라 꾸준히 정진하며 일정한 성과를 내고, 지역영화의 기대주로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일관된 세계관과 작업 스타일에 익숙하다면, 해당 작품들이 놀라울 만큼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연속된다는, 그리고 감독 본인의 얼굴이 자연스레 떠오른다는 발견에 도달할 테다.

<조의봉투>, 봉투 한 장의 무게감에 억눌린 청년세대의 고뇌

▲[사진=영화 ‘조의봉투’ 스틸 이미지]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이 쉽지 않은 난제인 것처럼 영화와 영화인의 분리 또한 칼로 무 자르듯 하기엔 무척 어려운 지점이다. 지역에서 근래 활발한 창작활동을 선보이는 중인 장주선 감독의 공식 데뷔작 <조의봉투> 역시 감독 본인과 분리해서 독해하기 힘든 결과물이다. 이 첫 작업은 이후 현재까지 3편의 단편을 더 선보인 감독의 작품 경향에서 ‘프로토타입’이라 해도 무방할 어떤 원형질을 담아낸다. “최초의 것”이자 모든 것의 기원인 셈이다.

# 친구의 때이른 죽음 앞에서도 계산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

취업준비생 ‘지희’는 지방 출신이지만 현재 서울에 머물며 취업 활동 중으로 설정된다. 영화의 도입부는 그가 처해있는 상황을 압축해서 전달하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몸을 누일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인 작은 원룸 안 풍경 속에서 주인공은 집주인과 통화하고 휴대전화 액정에 뜬 소식들을 확인한다. 집주인은 다음 달부터 월세를 5만 원 인상해 달라며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세입자 처지에 지희는 그저 사정해볼 수밖에 없지만 별로 통할 것 같진 않다. 다달이 공과금 납부 등 돈 나갈 날은 제꺽제꺽 다가오지만 취업준비생인 그의 통장은 잘 채워지지 않는다. “쉽게 되는 일이 없네”라는 주인공의 한숨은 현재 그가 처한 상황, 그리고 관객이 감정을 이입할 통로와 연결된다.

그렇게 한숨을 내쉬는 중에 한 통의 문자가 도착한다. 고등학교 동창 ‘가영’의 부고 소식이다. 꽤 가까웠던 사이인가 보다. 지희는 곧바로 고향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학업을 마친 후에도 사회가 바라는 궤도에 곧장 올라타지 못한 이들에겐 경조사에 참석하기 위한 필수전제, 부조금 처리 건이 부담이다. 가능하면 외면하거나 회피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지희의 심경은 복잡해진다. 남은 통장 잔액을 확인한 다음 장례식 참가비용을 계산하는 그녀의 움직임은 이후 영화가 전개될 방향을 사실상 결정한다. 여기까지는 환경결정론에 가까운 진행 흐름이다.

지희가 강박적으로 시달리는 조바심은 현재 자신의 상황과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이 고민하지 않아도 되도록 딱딱 결정해 주길 간절히 바랄 테지만, 우리의 인생에서 위기에 처할 때마다 막상 제대로 된 조언자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지희의 상황도 역시 그렇다. 그렇게 자신의 문제에만 파묻힌 나머지 그는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고 신경을 쓴다면 어렵지 않게 도움을 줄 수 있었던 할머니의 사정을 외면해버리고 만다. 이런 차가운 시류는 순환고리처럼 결국엔 지희에게로 다시 돌아와 난처하게 할 운명이다.

▲[사진=영화 ‘조의봉투’ 스틸 이미지]

주인공은 형식적 조문만 마치고 도로 상경할 계획이었다. 서두에서 공개된 대로 그에겐 냉큼 해결해야 할 것이 잔뜩 어깨를 짓누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인이 된 어릴 적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인연을 맺었던 친구의 오빠와 대면하자 옛 추억을 떠올리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밥이라도 먹고 가라는 권유에 마지못해 지희는 발걸음을 돌린다. 물론 실용적 목적(끼니를 해결해야 하니)도 읽히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의 계산적 행위를 부끄러워하며 (부조금 액수를 아까워한) 과오를 바로잡으려 시도한다. 물론 뜻이 좋다고 결과 또한 모두에게 해피엔딩이 되기를 기대할 순 없다. 의도와 달리 지희는 봉변당할 위기에 처한다. 간신히 낭패를 벗어나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지희의 표정은 내려올 때와는 무언가 달라 보인다. 하지만 주인공의 주변 상황이 크게 변한 건 없다.

# 주인공이 처하는 일련의 상황을 통해 형상화되는 동 세대적 고민

영화는 초반의 주인공을 둘러싼 배경 서사, 중반부에서 앞서 소개된 장치를 활용한 과거사 해설, 그리고 가장 클라이맥스라 할 반전 부분으로 연결되는 구성이다. 초반부에서 묘사된 내용은 청년실업 소재를 다룬 여타 독립 단편영화에서도 어렵지 않게 포착되는 요소다. 주제 전달과 상황 전개를 위해 애지중지 구사하는 익숙한 예시 장면들은 관객이 충분히 예측 가능한 맥락과 활용법이다. 그런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성을 갖췄기에 주인공이 영화 속에서 보이는 망설임, 그리고 별것 아닌 듯 보이는 찰나의 무게감은 큰 누수 없이 의도에 부합하며 제 몫을 감당한다.

후반부에서 주인공은 일종의 결단을 내린다. 그 직전까지 그가 마음속으로 오락가락하던 동요와 그 외화로 드러나는 구차스러움은 통장이건 머릿속이건 간에 본인이 처해있는 한없는 수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근저에는 영화 속 주인공은 물론 화면 바깥의 감독과 제작진, 그리고 또래 세대 다수가 공통으로 직면한 21세기 한국의 경제/사회적 악조건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감성과 추억에서 비롯된 개심 덕분에 순간적으로 기계적 ‘합리성’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에 결정적 반전을 주인공은 선보일 수 있었다. 물론 회심했다고 바로 천국이 보장된 건 아니다. 게다가 여전히 ‘실용주의’를 포기하기엔 자신이 처한 조건이 녹록하지 않다. 그 때문에 타인에겐 우스꽝스럽고 기괴하지만, 지희 본인에게는 절박할 수밖에 없는 해프닝과 뒤이은 위기가 도래한다. 영화를 본다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사진=영화 ‘조의봉투’ 스틸 이미지]

물론 감독의 첫 작업이다 보니 야심 가득 심어둔 몇 가지 상징이나 다소 전형적인 소품 활용법, 주인공이 반전을 결심한 이유의 전달력이 특출하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편이다. 한국 단편영화를 종종 접하는 이들이라면 어디서 본 것처럼 익숙한 구석이 많다고 느낄 법하다. 하지만 지역 단편영화에서 근래 종종 만날 수 있는 낯익은 얼굴들과 함께 감독은 자신이 구현하고 싶은 이야기, 본인과 제작진이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요소들을 큰 궤도 이탈 없이 끌고 나가는 데에는 무리없이 도달한 셈이다. 단품 자체로는 큰 개성이 느껴지진 않더라도 작가의 작품목록 전체를 돌아보게 된다면 ‘시작’이자 ‘출발점’으로 의미가 작을 수 없는 결과물이다.

무엇보다 영화 속에서 20대 중반으로 설정된 주인공의 ‘찌질함’은 동 세대 취업준비생들에겐 공감대를 끌어내기에 어려울 게 없어 보인다. 그가 처한 조건이라면 누구라도 3만 원 넣을까 5만 원 넣을까를 고민하지 않을까? 아직 장례식이 익숙하지 않을 나이에 편지봉투가 식장에 비치되어 있는데 바보같이 편의점에서 쓸 일도 없는 봉투 묶음을 사는 건 어리석은 낭비 아니냐 하는 질타는 별 의미가 없을뿐더러 악의적이기까지 하다. 조금만 배려하고 도우려 한다면 택시기사건 편의점 직원이건 충고 한마디쯤 해줄 수 있었겠지만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 물론 주인공 역시 그러지 않았다. 마치 환영처럼 출현하는 버스터미널의 할머니는 그런 대중의 속성을 지적하려는 의도였을 테다. 그런 포착과 통찰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나와 별개로 자기연민에 그치는 숱한 학생 단편영화와 본 작품의 세계관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무난한 출발의 기록으로 남을 만하다.

▲[사진=영화 ‘조의봉투’ 스틸 이미지]

<돌고래 마라톤>

김선빈 감독의 데뷔작품은 <조의봉투>와 동일한 배경과 상황을 상이한 컬러로 그려낸다. 이 작품 역시 20대 중반의 주인공이 취업 준비를 위해 어학 스터디그룹에 참여하면서 겪게 되는 일련의 에피소드이지만, 그 온도 차는 상당하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보다는 작가 각자의 개별적 성향과 관점, 그리고 작업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초점의 상이함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 망한 토익 스터디그룹 구성원에게 닥쳐온 미스터리

▲[사진=영화 ‘돌고래 마라톤’ 스틸 이미지]

‘수안’은 취업 준비에 필수가 된 토익 성적 향상을 위해 영어학원 수강생 동료들과 함께 스터디그룹을 만든다. 6명이 모인 그룹은 하지만 출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수안의 시선을 빌어 영화는 이 그룹의 (흥)망(성)쇠 과정을 요약해서 관객에게 전달한다. 사실 흥하고 성했던 적은 단 1초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초반부터 각자의 꿍꿍이와 성향으로 동상이몽하던 그룹 구성원들은 곧 뿔뿔이 흩어진다. 누군가는 커플로 눈이 맞아 함께 나가고, 누구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다른 누구는 자기 목적은 달성했으니 쿨하게 떠나버린다. 6명 중 4명이 떠난 자리에 ‘수안’과 또 다른 멤버 ‘석’만 남았다. 이 모든 과정이 몇 배속으로 관객에게 전달되기에 늘어질 틈이 없다.

수안은 상황이 막막하지만 굳이 그룹을 해체하진 않는다. 아마 해체한다 해도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차피 공부는 해야 하고 다른 유망한 그룹에 합류할 길도 당분간 없다면 큰 기대 없이 예약된 스터디 룸에서 공부하면 된다. 그런데 어쨌건 아직 그룹 동료가 1명 남아 있긴 하다. ‘석’이다. 그런데 그는 도무지 공부에 큰 의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굳이 떠난 구성원들처럼 간섭이나 참견을 하진 않기에 일단 수안은 그룹을 깨지 않고 현 상황을 유지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석에겐 애매하게 특별한 것이 하나 있다. 그가 늘 착장한 티셔츠다. 요즘 세태에 한여름에 패딩을 입고 나타나지 않는다면 굳이 남의 복장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게 못 되지만, 수안은 남들에게 말 못 할 궁금증이 생기고 만다.

석은 늘 외투 안에 같은 반팔 티셔츠를 입는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수안은 티셔츠에 코팅된 ‘돌고래 마라톤’이란 로고와 이미지가 계속 신경이 쓰인다. 대체 저 사람은 옷이 저것밖에 없는 걸까? 그런데 저 이미지가 돌고래가 맞나? 아무리 봐도 상어 같은데? 그런데 저 티셔츠의 유래는 무엇일까? 한창 공부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이건만 수안은 그 의문에 사로잡히고 만다. 게다가 늘 쫓기는 심경인 본인과 달리 한없이 여유롭게 보이는, 하지만 그 여유에 근거도 딱히 없는 것만 같은 석도 수상쩍다. 어느 날 마침내 그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 어느 오후의 낮잠 속 꿈처럼, 찰나의 휴식을 선사하는 영화

영화는 평범한 토익 스터디그룹의 몰락 후 그곳에 남은 ‘잉여’들의 초상을 그리지만, 그 풍경은 세상이 흔히 단정하는 낙오의 그림자로 점철되지 않는다. 약간은 판타지풍의 구전 담화를 통해 감독은 각박하게 청년(뿐만은 아니지만) 세대에게 과도한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소화해내지 못하면 거침없이 열등하다며 ‘노력’ 부족으로 단죄하는 세태를 풍자하고, 이들에게 휴식 혹은 피난처를 제공해야 한다는 안타깝고 소박한 열망을 풀어내려 한다.

▲[사진=영화 ‘돌고래 마라톤’ 스틸 이미지]

그런 열망은 수안에게 석이 들려주는 돌고래 마라톤의 유래에 의해 표상된다. 듣고도 어처구니가 없어 수안이 실소할 만큼 그 마라톤이란 것의 실체는 허무하기 그지없다. 딱히 별 의미도, 효용도 없다고 느끼기 딱 좋다. 하지만 세상의 잣대와 무관하게 자신의 영혼은 누리지 못하는 여유와 안정감을 지닌 상대에게 말 못 할 부러움은 어쩔 수 없다. 그 이야기를 들어가며 주인공은 자신의 상황을 진단하고 지금 본인에게 필요한 게 과연 무엇인지 일단 멈춰 돌아볼 찰나의 순간을 가질 수 있다.

‘돌고래 마라톤’은 수안이 희구해도 결코 얻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치열한 경쟁과 노력을 통해 경쟁자들을 제치고 선택받길 갈망하는 취업준비생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들으나 마나 수준의 허무맹랑한 일화이지만 정작 수안은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다. 어느새 자신이 실제로 그 마라톤을 경험한 석의 자리에 선 것처럼 상상하면서. 그런 주인공의 심경 변화는 곧바로 감독과 제작진의 머리 한구석에 있는 작은 꿈이자, 자신들이 상정한 관객들에게 전달하고픈 이야기로 자리를 잡는다.

▲[사진=영화 ‘돌고래 마라톤’ 스틸 이미지]

영화의 길에 주변의 도움에 힘입어 첫 출발선에 선 감독은 동 세대 취업절벽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자기 또래들이 무언으로 공유하는 정서에 근접해 다뤘다. 특이점이라면 장르적으로 코미디의 호흡과 리듬을 전-중반까지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점이다. 토익 스터디그룹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경험에 기반을 둔) 여러 유형의 캐릭터 묘사, 하나둘 각자의 사정으로 이탈하게 되는 과정 묘사를 통해 주인공의 고립과 초조감을 은유하는 지점들이 유쾌하면서도 씁쓸하다. 전형적인 조별과제 딜레마 아닌가. 그만큼 차가워진 무한경쟁 세태 가운데 개별 초상들에게 선택지가 많지 않다. 소재에 대한 감독과 제작진의 세대적 근접성이 발휘된 단면이다.

하지만 그런 익숙하고 제법 솜씨 좋은 코믹한 리듬은 후반부 돌고래 마라톤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부터 전형적인 YOLO 정서에 의지하며 힘을 잃는다. 그 대신 영화가 전달하고자 한 주제의식, 자신이 속한 세대에 대한 격려의 기운이 무한도로 짙어진다. 의도 구현에는 충실하지만 동 세대 영화들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전형성 때문에 장점이 퇴색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굳이 안정된 기성품을 기대하기보단 의외성에서 오는 새로움을 찾는다면 꽤 맛깔나게 다음을 기다릴 관심은 남겨준다.

▲[사진=영화 ‘돌고래 마라톤’ 스틸 이미지]

◆ 왜 개별 작품으로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지역영화에 집착하는가?

온라인 공간을 배회하다 문득 어떤 게시물을 발견했다. 본 칼럼을 ‘도저히 못 봐줄 지경’이라는’ 누군가의 짧은 한마디였다. 오직 ‘애향심’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자화자찬이란 비판일 테다. 굳이 부인할 것도 없다. 사실이 그러하니까. 하지만 왜 굳이 그렇게 좋은 점만 보려 하면서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무명의 영화’들에 집착하는 걸까? 남들이 쓰지 않는 소재라 행여나 하는 기대로 ‘블루 오션’을 노리는 걸까? 한번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심경이다.

영화연구의 방법론은 해당 장르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무수하게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 그중에도 사회과학적 영화비평이나 역사적 비평연구는 엄연히 20세기 초반부터 중요한 방법론으로 활용되어왔다. 독일에서 나치즘이 대두하게 된 사회적 배경을 동시기 독일영화들에 내재된 분위기와 정서들과 연결해 풀이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대표작 { 칼리가리에서 히틀러로 : 독일 영화의 심리학적 역사}가 대표적 사례일 테다. 이런 연구는 개별 ‘단품’으로서 영화가 보여주는 예술적 성취와 별개로 영화가 갖는 대중예술/문화적 특성에 천착하려 한다. 동시기의 영화라면 아무리 대중오락물이라 해도 해당 시기 사회와 세대의 취향과 상황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를 통해 공식적인 정치나 제도와는 차별화된 발견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 고유의 미학을 중시하는 이들에겐 과도하게 영화 자체가 의도하지 않은 ‘외부적’ 측면에 치중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물론 그런 거창한 비교대상이 되기엔 필자의 글은 더없이 조악하지만, 역설적으로 딱히 경쟁상대가 없다 보니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아마 다양한 이들이 본 칼럼이 주력하는 단면을 다룬다면 굳이 계속 써야 할 필요는 사라지겠지만, 불행하게도 우월한 라이벌들이 통 보이지 않기에 불행히도 계속 작업을 이어갈 수밖에 도리가 없는 노릇이다.

다른 이유를 들자면, 지역에서 제작되는 독립영화가 반드시 외부 영화제에 나가 올림픽 메달 경쟁을 하듯 주목받고 ‘역수입’되어야 가치를 인정받는가 하는 제기 또한 한 부분이 된다. 그렇게 미디어를 타고 명성을 떨치지 않더라도 기록적 가치, 사회학적 사료로 남을 가치가 있다면, 혹은 영화가 의도한 기대효과를 충족시킨다면 그 역시 의미가 없지 않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누구나 초장부터 천재성을 드러낼 순 없지 않은가. 적어도 ‘그들의 첫 번째 영화’는 충분히 이들의 이후 경로를 밝히는 이정표이자 가로등 역할을 충실히 소화한 것은 물론, 자기들의 세대에서만 은밀히 통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속사정을 보편적으로 공유 가능한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에는 충분했단 생각이다. 훗날 이 감독들의 전작을 연대기적으로 고찰할 기회가 된다면 필자의 주장을 한 번 검증받을 기회가 생기리라 믿으며.

<작품정보>

조의봉투 Condolence Money
2020│한국│드라마│22분
감독/각본 장주선
출연 김현진(지희 역), 홍석우(진영 역), 박지수(남자 역),
택시기사(손호석 역), 김명진(가영 역), 권충실(할머니 역)
촬영 강유순
PD 김근영
음악 김가영
미술 이다정
사운드 홍성준(이너비트)
배급 시네허브

2020 동대문영상단편영화제 청년/대학생부문 심사위원상
2020 코닥어패럴단편영화제 입선

돌고래 마라톤 Dolphin Marathorn
2020년│한국│코미디│19분
감독/각본/편집 김선빈
출연 김유정(수안 역), 은혜수(석 역)
촬영 정수연
PD 김민규
미술 김재승
동시녹음 이명형
색보정 전상진
제작 대구영상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