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꼼꼼해야 할 토지거래, 조선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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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 음력 2월 5일, 구미에 사는 노상추는 이번 토지 거래가 영 개운하지 않았다. 얼마 전 생원 홍진휴로부터 사들인 면화 밭 때문이었다. 당시 홍진휴는 집을 새로 지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소출이 좋은 면화 밭을 팔기로 했고, 이 소식을 들은 노상추는 아버지 노철과 상의해서 이를 사들였던 터였다. 그런데 토지매매문기를 받아들 때까지 노철과 노상추는 실제 땅도 확인하지 못했다. 아버지 노철과 함께 그 땅을 보려 했지만, 사는 곳이 달라 시간을 못 맞춘 탓이었다.

아버지 노철이 노상추를 찾은 날을 기다려 토지매매문기를 꺼내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실측도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문서에 쓰여 있는 땅 면적과 비교하니, 실측 결과가 달랐다. 노비의 이름으로 매매문기를 작성하는 관행 탓에 글자를 모르는 종이 이를 일일이 확인하지 못한 탓이었다.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친걸음에 노상추는 아버지 노철과 함께 홍진휴가 사는 주천 마을을 찾았지만, 출타 중이어서 만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버지 노철이 종 만의를 보내왔다. 전날 주천 마을을 다녀 간 뒤, 홍진휴가 그 이야기를 듣고 노철을 찾았던 터였다. 홍진휴는 땅 크기에 차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러면 다른 면화 밭을 주겠으니, 계속 거래를 이어가자는 부탁을 했다. 홍진휴가 집을 짓기 위해 마음이 급했던 듯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노상추는 이번에는 홍진휴의 땅을 사지 않는 게 더 좋겠다고 판단했다. 아직 땅 소유권을 바꾸는 절차에 들어가지 않은 터라, 매매문기만 파기하고 돈을 돌려받으면 될 일이었다. 다행히 홍진휴 역시 별다른 이의 제기 없이 거래대금 170냥을 돌려 주면서, 일은 쉽게 매듭지어졌다.

일상의 기록이기도 하고, 당시 지역에서 노상추 가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도 있어서, 독자들이 기대할 만한 갈등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요즘도 늘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이지만, 그러나 홍진휴가 순순히 계약을 무른 이유가 단순히 배려심이 넓고 사람이 좋은 탓만은 아니었다. 토지거래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도 일반인이 평생을 살면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거래 가운데 하나이다. 당연히 거래하는 개인도 꼼꼼하게 확인에 확인을 거쳐야 하지만, 그만큼 정부가 제도적으로 이들의 거래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법과 제도를 통해 보호하기 마련이다. 홍진휴가 순순히 물러난 이유이다.

이 같은 개인 간의 매매에 대한 법과 제도의 마련은 의외로 역사가 깊다. 조선시대 역시 토지거래는 개인 입장에서 큰 거래였고, 토지란 게 옮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을 보증하는 제도가 필요했다. 이 때문에 토지매매에는 거래 당사자뿐만 아니라, 토지의 소유권을 보증하고 인증해 주는 객관적 주체 역시 필요했다. 조선은 이러한 과정을 매우 꼼꼼하게 법제화해서 관리했던 나라였다.

조선시대 토지매매가 법적으로 허용된 것은 세종 6년인 1424년부터로 알려져 있다. 법으로 매매를 보장하고, 바뀐 재산의 소유권을 정부가 파악하고 인증하는 제도가 이때부터 시행되었다는 말이다. 조선은 법으로 토지를 매매할 때 반드시 토지매매문기를 작성하고, 이를 100일 안에 관아에 신고하여 등기 절차에 해당하는 입안立案을 받도록 규정했다. 당연히 입안을 발급하기 위해서는 꼼꼼한 확인 절차가 필요했고, 이를 통해 정부는 백성들의 정당한 재산권을 인정하고 증명해 주었다.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토지 매매의 시작은 매매의사를 기반으로 한 토지매매문기의 작성이다. 토지매매문기는 지금 관점에서 보면 토지매매 계약서이다. 토지매매문기 첫 줄에는 작성 연월일과 매수인의 성명을 기재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선의 독특한 특징이 발견된다. 토지매매문기 대부분의 경우 땅 주인이 양반이라면 실제 땅주인의 이름을 적는 게 아니라, 그 땅을 경작하게 될, 또는 양반의 이름을 대리할 노비의 이름을 기재했다. 유교 이념에 따라 상행위를 신분이 낮은 이들의 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매수인을 기록하고 난 뒤, 그 아래에는 매도사유와 토지소재지, 토지 끝 4곳을 표시한 4표標를 기재했다. 땅의 크기와 파는 이유를 관아에서 확인할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매매 가격을 기재했다. 나아가 이러한 사실이 정확하게 이루어졌음을 증명하기 위해 매도인과 관련 증인, 그리고 대신 매매문기를 작성해 주었던 필집筆執이 서명 및 수결(현재의 사인에 해당)을 했다. 당시 증인들이나 매도인이 수결을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손 모양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렇게 작성된 매매문기를 통해 매매계약이 성사되면, 매수인은 이 매매문기를 첨부해서 관아에 입안을 신청하는 문서인 소지를 제출했다. 그러면 관아에서는 매매문기를 기반으로 매도인과 증인, 그리고 필집 등을 불러 매매 사실에 대한 진술서인 초사를 받았다. 이렇게 한 뒤 최종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입안을 발급하겠다는 결정을 매수인이 낸 소지에 여백에 적어 주었는데, 이를 제음 혹은 뎨김이라고 불렀다. 이를 기반으로 최종 문건인 입안을 발급했다.

이처럼 토지 매매는 개인 입장에서도 꼼꼼한 준비와 확인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지만, 국가 입장에서도 상당한 행정력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물론 정부차원에서 재산의 소유권을 확인함으로써 세금 수취를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백성들의 재산 변동에 국가가 개입함으로써 그들의 재산권을 보호하려는 목적 역시 강했다. 형사사건에 대한 꼼꼼한 처리 기준만큼이나 재산권 처리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기준을 마련한 이유였다. 최소한 국가가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