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권위와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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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이 완연해졌다. 경상감사 조재호는 평상시 집무 보던 공간을 떠나 결재해야 할 서류들을 관풍각으로 옮겼다. 업무에 치여 살 팔자야 어쩔 수 없지만, 가는 봄볕까지 그냥 떠나보낼 수는 없었던 터였다. 그러나 이도 잠시, 진주에서 올라온 유생 47명과 알현할 시간이 다가오자, 상쾌했던 봄바람마저 날아가 버린 듯했다.

진주 유생들은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당시 정황에서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얼마 전, 진주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진주에는 이를 조사할 형부차사관刑部差使官이 파견되었는데, 그가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진주향교 대성전을 침범한 일이 있었다. 대성전은 향교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으로, 유학을 창시했던 공자와 맹자를 비롯한 성현들이 배향되어 있었다. 함부로 침범하는 일 그 자체만으로도 유학의 신성을 훼손하는 일이었으며, 나아가 유학에 기반한 이념적 권위를 침범한 일이기도 했다. 진주 유생 100여 명은 지역에서 관련 내용을 게시하고, 집단으로 경상감영을 찾아 소장을 제출하여 형부차사관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경상감사 조재호의 생각은 달랐다. 형부차사관은 살인사건과 같은 중범죄를 해결하고 막기 위해 국가 권력을 위임받은 관료였다. 범인을 잡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는 게 문제 될 것은 없으며, 혐의자를 잡기 위해 향교 대성전을 넘는 일 역시 올바른 권력의 행사였다. 형부차사관의 권력 행사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대성전을 침범했다는 이유만으로 형부차사관을 처벌할 수는 없었다. 죄가 없는데 죄가 있다고 우겨대니, 조재호가 볼 때 진주 유생들은 무고죄를 범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조재호는 형부차사관의 처벌을 청하는 일을 주도했던 유생 몇 명을 잡아들였다. 전날인 1752년 음력 3월 5일의 일이었다.

이제 이 일을 처결해야 했다. 알현의 형식을 취했지만, 조재호는 이 문제를 조목조목 따진 후 판결을 내리는 재판의 장으로 이들을 만날 요량이었다. 진주 유생 47명과 전날 잡아들였던 유생들을 모두 선화당 앞에 세웠다. 대성전을 넘은 형부차사관에 대한 무고성 상소문을 게시하고 경상감영까지 찾아와 그를 처벌하라고 청원한 연유를 캐물었다. 특히 조재호는 이 문제가 국가 권력에 대한 심각한 침해 행위임을 분명히 하면서, 비록 대성전이 국가 권위의 상징이라 해도 살인범을 잡기 위한 법의 집행을 막을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경상감사로서 조재호는 죄의 경중에 따라 죄질이 무거운 사람은 엄하게 신문했고, 가벼운 죄라 해도 태형과 장형으로 처결했다. 그리고 여기에 동조해서 참여했던 나머지 유생들은 각 고을로 압송하여 가둔 후 처결을 기다리게 했다. 국가 권력을 침범한 일에 대해서는 엄하게 처벌함으로써,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일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그 역시 조선의 관료로서 유학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정당한 국가 권력의 집행을 막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조선은 유학 이념을 기반으로 건립된 나라이다. 통치의 근간이 유학 이념에 있었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유학을 창시했던 공자와 맹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들은 국가의 성현들이 되었다. 당연히 그들의 위패를 모시고 그들을 제향하는 공간은 국가 차원에서 신성시했고, 이를 통해 조선은 자기 통치의 권위를 정당화했다. 국가 권력의 당위가 유학의 권위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유학의 이념적 틀을 벗어나는 권력 행사에 대해서는 ‘무도’하다고 평가했다. 진주 유생들 입장에서 대성전은 이러한 권위의 상징이었고, 따라서 아무리 국가 권력이라 해도 함부로 넘어서는 안 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조재호 입장에서 보면, 권력이 비록 유학의 권위에 기대고 있다 해도, 그 권위가 자기 보호만을 위해 정당한 국가 권력의 행사를 막아서는 안 되었다. 사람을 죽인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국가 권력이 반드시 해야 할 정당한 권력의 집행이며, 이를 위해서는 국가 권력이 미치지 못할 공간이 없어야 했다. 그것이 비록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이라 해도, 그 권위는 정당한 권력의 행사를 보장함으로써 보호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유학 이념이 기반이 된 조선 사회는 권위와 권력이 나누어져 있었다. 올바름의 당위를 의미하는 권위는 유학에 있었고, 따라서 유학을 수양하는 공간과 그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통해 권위가 드러났다. 권력이야 당연히 세습받는 왕권과 그로부터 일정 영역의 통치를 위임받은 사람들에게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권력은 자기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학의 권위에 기대었고, 유학은 권력의 권위를 보증해 주면서 자기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권위와 권력이 부딪치는 경우였다. 권위를 상징하는 진주향교 입장에서는 권위의 상징인 대성전마저 권력이 침범함으로써 무도한 권력이 되었다. 이에 비해 권력은 국가 권력의 올바른 행사 과정에서 이루어진 행위가 미치지 못할 물리적 공간은 없어야 했다. 비록 대성전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유학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해도, 그 권위가 보호받기 위해서는 국가 권력의 정당한 집행을 보장할 수 있어야 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이처럼 어려운 문제가 사회에서 작동될 때 그 사회는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 어떤 사회든 권력이 권위를 독점하거나, 권위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은 비극이다. 파시즘이나 북한의 왕조가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권위와 권력은 서로를 견제하며, 서로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권력이 자기 정당성 확보를 위해 권위에 기대고 이를 살피는 일은 권력을 건강하게 만드는 기저였다. 유학이 권위의 상징이었던 사회를 넘어 이제 그 권위는 국민들에게 이관되었고, 선출된 권력은 권위의 상징인 국민으로부터 자기 권력의 당위를 확보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