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동대구역에 박정희 동상을 세운다고? /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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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뉴스민은 대구시의 박정희 동상 건립 추진에 대한 각계각층의 비판 의견을 연속 게재한다. 첫 번째는 국가폭력과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인한 역사적 고찰을 해온 사회학자 김동춘 성공회대 명예교수(좋은세상연구소 대표)의 글을 싣는다. 김동춘 교수는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박정희에 대한 기억의 정치

동대구역 광장 등에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을 세우자는 기념사업 조례안이 대구시의회 32명 의원 중 31명 찬성으로 통과했다고 한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박정희 기념사업 구상을 발표한 이후 시의회가 그것을 받아서 사업 집행의 근거를 마련했다. 이 사업 추진 과정에서 공청회나 여론조사 절차는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박정희식 통치방식으로 박정희 기념사업이 실시되게 되었고, 시민의 세금으로 이 사업이 추진될 것 같다.

▲구미시 상모동에 조성된 박정희 기념 동상

박정희의 고향인 구미의 생가 근처에 이미 박정희 동상이 건립되어 있고, 구미시에서도 500억의 예산을 들여서 박정희 숭모관을 건립을 추진한다고 한다. 그런데 왜 대구에서 또 동상을 세우려 하는가? 홍준표 시장은 광주에 가보니 곳곳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흔적이 있는데 대구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기념 시설이 없다고 푸념했다. 광주를 대표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관련 각종 시설이 있으니, 대구를 대표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광장이나 동상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은 광주를 대표하고 박정희는 대구, 경북만을 대표하는가? 광주 사람들이 똘똘 뭉치니 대구도 똘똘 뭉치자는 수십 년 동안 먹혀든 전형적인 경상도 엘리트들의 지역주의 조장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광주의 김대중 전 대통령 관련 시설은 그가 광주를 정치적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만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가 평생 추구했던 민주, 인권, 평화 등의 보편가치가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박정희 기념 동상은 후대 사람들과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어떤 보편가치를 담고 있는가? 경제성장, 빈곤탈피? 국민적 자신감? 경상도 지역발전? 이런 내용을 보여주는 데는 고향 구미의 동상, 서울에 건립된 박정희 기념관으로 족하다.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추앙하고 그의 치적을 높게 평가하는 대구 사람의 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높은 것도 사실이다. 이 지역에는 60대 이상은 물론, 젊은 세대들도 부모들의영향을 받아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이 있고, 일부는 그를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대구, 경북 내의 일부 박정희의 최대 피해자들은 물론 다른 지역의 상당수의 국민들은 매우 강력하게 그의 통치 기간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종신 대통령을 꿈꾼 독재자의 이력과 심각한 인권침해,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 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일본 군인의 이력은 절대 지워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시기, 특히 1970년대 후반기에 대한 기억은 그 시절을 겪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성장과 도시화, 새 일자리 창출과 소득향상, 100억 수출 달성, 통일벼 보급과 쌀 자급의 신화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상회, 간첩 신고, 교련복과 학생 군사훈련, 언론 통제, 장발 단속, 금지곡, 경찰과 중앙정보부의 사찰과 감시의 기억이 있는 사람도 있다. 물론 당시 인구의 반을 훨씬 넘었던 농촌 출신들은 희망과 비전을 설파했던 빈농출신 박정희에게 정서적 공감대를 갖고 있다.

박정희가 지역주의를 활용해서 집권했던 1971년 이전까지는 영남뿐만 아니라 호남사람들 상당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기간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의 계층상승을 성취했던 특히 한국의 권력과 부를 거머쥐고 있는 60대 이상의 사람들은 전자의 경험과 기억, 즉 자신의 경제적인 처지의 변화를 더 피부로 느꼈고, 그래서 박정희 정권 시기 국가발전 특히 물질적인 수준의 향상을 가장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점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두 가지 기억 모두 박정희 통치의 두 측면을 반영한다. 즉,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인권탄압은 박정희 정권 시기의 대표적인 두 모습이고, 이 두 역사는 오늘까지 한국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박정희는 일제 식민지, 지구적 반공주의가 만들어낸 인물

5.16쿠데타 이후 1979년 10.26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에게 총을 맞아 사망할 때까지 18년 동안 한국을 통치한 박정희는 1973년 쿠데타를 일으켜 17년 동안 통치했던 칠레의 피노체트, 1965년 쿠데타를 일으켜 32년 동안 인도네시아를 통치한 수하르토 대통령과 가장 유사한 이력과 통치방식을 구사했다. 이 중 피노체트는 박정희 정권 이상의 억압적인 정치를 실시했다. 당시 칠레에서는 반체제 인사 등 3천여 명이 숨지거나 실종됐고, 고문 등 인권탄압도 만연했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집권 시기에 유례없는 경제발전을 이루어 낸 경제 대통령이었다. 독립운동가 수카르노 정부를 뒤엎고 쿠데타로 집권하고 많은 민중을 학살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도 인도네시아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경제 대통령이었다.

박정희는 피노체트나 수하르토에 비해 볼 때, 개인적 축재를 한 것도 없고, 쿠데타 이전에도 비교적 청렴한 군인이었으며, 집권 후 청와대에서의 생활도 비교적 소박했다. 북한의 김일성이나 그 이전의 이승만 대통령과 비교해 볼 때, 개인 우상화를 노골적으로 조장하지도 않았다. 일본과의 굴욕적인 국교정상화를 강행했으나, 베트남 파병, 중동 붐 편승 등에서 경제적 실리를 우선시했고, 중화학 공업화와 독자 안보 노선을 추진하다가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도 유지했으며, 일방적으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의 쿠데타와 국가경영 방식은 그가 젊은 시절에 배운 일본의 천황제 충복들의 파시즘적 국가 개조론, 만주국에서 실시한 경제성장 만능주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특히, 북한과의 대결구조, 개인적 콤플렉스와 집권 과정의 정당성 결여는 박정희가 성장지상주의에 집착하게 했으며, 그래서 그의 경제성장 노선은 성과주의와 폭력성을 내장하고 있었다.

우리는 오늘까지 그 부정적인 유산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는 시대 분위기에 편승했던 처세형 인간이자 권력 추종형 인간이었으며, 5.16쿠데타 이전인 군인 시절에 국가의 발전에 대한 철학과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다. 즉, 쿠데타가 오직 권력욕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는 군부 내의 부패 청산 의지 이상의 국가와 민족의 이상과 발전에 대한 철학과 소신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권력 장악 이후 사후적으로 체제 정당성을 위해서 빈곤 탈피와 경제성장 전략 드라이브를 걸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자신이 좌익 사냥의 피해자이면서도 철저하게 좌익사냥의 수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피노체트나 수하르토 박정희 모두는 미국의 후원하에서 경제발전을 성취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전략은 외적으로는 194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통합전략의 후원하에서 진행된 것이며, 일제 식민지 지배, 6.25 전쟁이후 군부의 비대화, 일제가 남긴 효율적인 관료제도를 기반으로 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아시아 신생국의 저임 경공업을 활성화할 수 있었던 당시의 국제분업 조건이며 그 최대의 지휘자는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은 그 전부터 구상했던 한국을 일본 경제권에 통합시키는 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고 한국 측 파트너가 바로 군부 지도자인 박정희였다. 미국이 박정희 쿠데타에 어떻게 개입했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쿠데타 직후 그의 집권을 사실상 승인했으며, 한일국교정상화(일본의 경제지원)을 배후에서 적극 주선했으며, 박정희가 제3세계 식의 민족적 경제발전 노선을 추진하려다가 수출위주의 노선으로 선회한 것은 미국의 개입 때문이다.

박정희의 지도력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경제 성장 전략이 성과를 거둔 가장 중요한 이유는 8.15 직후 그리고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항일독립운동, 사회주의 세력이 거의 완벽하게 제거되었고, 일제 파시즘에 적극 협력했던 군부. 경찰, 관료 집단이 부활하였으며, 노동운동 등 자본주의적 성장전략에 장애 요소들이 거의 제거되었고, 북한과의 대결구도 하에서 남한의 농지개혁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말기의 유신체제는 전형적인 가부장주의 유사 파시즘 체제였다. 파시즘은 경제발전, 물질적 번영, 완전고용과 안정적인 성장 등을 정당화의 기반으로 삼는다. 1939년 히틀러 당시 독일,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이 그러했다. 박정희는 피노체트나 수하르토와 비슷하게 집권 과정이나 통치과정에서 심각한 결함을 드러냈지만, 모두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군사주의에 기초한 파시즘은 인간을 도구화하고, 목적을 위해 수단을 무시한다. 국가안보의 위기의식과 적에 대한 집단적 공포는 국가 내부의 의심되는 구성원들에 대한 고문, 테러, 학살 등 반인도적이고 반인권적인 억압을 정당화한다.

칠레나 인도네시아에도 피노체트 시절과 수하르토 독재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20% 내외는 있다. 그런데 칠레나 인도네시아에서 이들 독재자들의 공적을 미화하면서 동상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것은 경제발전은 집권과 통치의 취약성을 만회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집권 시기의 인권침해와 잔혹한 통치의 사실이 무시하고서 숭배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상을 건립하려면 시민이 먼저 시작해야

국민의 세금으로 공공장소에 과거 지도자의 동상을 세우려면 그가 독립이나 국가건설 과정에서 부인할 수 없는 업적이 있어야 하며, 그것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하며, 후대의 사람들과 외국인들에게도 보여줄 미래지향적인 가치와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박정희는 경제발전 지도력을 발휘한 공로는 있지만 그를 국가나 민족의 영웅으로 보기는 어렵다. 박정희는 그와 동시대의 제3세계의 지도자인 나세르, 수카르노, 호지명 등과는 오히려 정반대로 국가건설을 향한 반파시즘, 반제국주의 운동 과정에서 민족의 편에 서기보다는 민족을 부인하는 세력의 편에 섰던 사람이다. 그는 파시즘적 군부독재 체제로 특징지어지는 일제의 천황제 지배하에서 그는 천황의 충실한 충복으로서 출세의 길을 도모했던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박정희가 사망한 이후에 곧 전두환 정권이 7년 동안 유지되었고, 이후 노태우 정권 5년이 더 연장되었기 때문에 박정희 신화가 지금처럼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사후 15년 동안 박정희 군부세력과 그 후계자들이 한국의 권력을 여전히 장악했고, 그의 가장 중요한 권력기반인 중앙정보부가 안기부로 명칭을 변경하여 계속 정적과 국민을 사찰하는 기관으로 활동을 했고,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 출세를 한 엘리트들이 정치 사회의 각 영역에 계속 우두머리로 남아서 미디어와 교육을 통해 안보와 성장, 그리고 박정희식 논리를 국민에게 주입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박정희를 여전히 숭배하는 대구, 경북의 60대 이상의 사람들은 지난 50년 동안 아직 지난 100년 동안 정권 교체의 경험을 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박정희 정권 시기에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이 그 시기에 학교에서 배운 것과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지만 대구 경북 사람들은 특히나 다른 시각을 접할 기회가 없이 과거의 학습과 경험을 갖고서 평생을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대구 지역사회의 여론과 정치의식으로 남아서 정치적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홍준표 시장의 지역주의 조장 발언과 박정희 동상 추진이 먹혀들어갈 수 있다.

물론 대구, 경북 사람들 중 다수가 박정희를 숭배하는 것 자체는 현실이다. 그래서 이들이 자발적으로 동상 건립을 제안하고, 성금을 모으는 등의 방식으로 기념사업을 먼저 시작했더라면 대구시의회에서 논의해서 예산을 지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현재 대구시장이자 차기 대권을 꿈꾸는 홍준표의 입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문제다.

즉,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건립 작업은 다분히 정치성을 갖고 있다. 그 정치성은 바로 홍준표 시장의 발언, 광주에 김대중이 있는데 왜 대구에는 박정희가 없냐는 식의 낡은 지역주의 동원 발언이고, 이런 지역주의를 동원하여 중앙정치를 장악해 온 대구, 경북 출신 정치가들의 전형적인 행태다.

지금 대구, 경북은 실업, 빈곤, 자살 등 모든 경제 사회 지표에서 한국에서 가장 뒤떨어진 지역이다. 과연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가 대구, 경북을 차별했는가? 도시나 시민들의 상황을 광주, 전남과 비교하는 것은 바로 대구, 경북의 기득권 엘리트의 정치공작이다. 지금 대구나 광주나 수도권이 밖의 모든 지역사회의 침체는 박정희식 수도권 중심 개발전략의 귀결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대구시민들이 이들 지역 엘리트의 들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김동춘(성공회대 명예교수. 좋은세상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