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마우스’, ‘인간 동물’의 딜레마에 침묵하지 않기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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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화 마우스’, 곰곰이 따져보면 살벌한 생물종

며칠 전 포탈 사이트 뉴스에서 검색한 기사 하나. ‘인간화 마우스’ 관련 시장이 연 7.8% 성장으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화 마우스’는 뭘까? 이것저것 검색해 본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사전적 의미를 확인해 보니 인간의 세포나 신체 조직을 이식한 유전자 변형 설치류를 이르는 표현이다. 여기에다 의도적으로 면역력을 대폭 떨어뜨려 실험에 대한 저항력을 최소화한 덕분에 동물실험에서 얻을 수 있는 효과를 극대화한 모델이라고 한다. 기사를 읽고 개념을 확인해가며 점점 오싹해졌다. 예전에 디스토피아 SF 만화나 영화에서 보던, 인간의 신체 부위를 인위적으로 이식한 쥐의 형상이 갑자기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기사에선 특히 암 치료를 위해 면역력을 고의로 결핍시킨 인간화 마우스 모델에 암 환자의 종양을 이식해 환자에게 효능이 있는 항암제를 연구하는 이종 간 이식이 암 치료제 연구에 큰 진전을 보인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실험이 가능한 건 인간화 마우스의 원래 종인 설치류(쥐)가 의외로 인간과 가까운 ‘영장상목’에 속해 유전적으로 가치가 높은 데다, 짧은 번식주기를 살려 몇 대를 연속해 관찰하기 편리한 점 때문이다. 공상과학영화에서만 볼 것 같았던, 대체용 장기를 미리 배양해 뒀다가 이식 수술에 바로 활용하는 게 어쩌면 실현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비인간 동물을 활용한 생체 실험은 과거에는 광범위하게 행해졌지만, 점차 윤리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지금은 축소된 상태다. 주로 질병 연구와 화장품 실험 등의 용도였으나 현재는 화장품 실험에선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다만 의료산업 관련해선 여전히 진행 중이며 국가별로 찬반 논쟁이 거센 대목이기도 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체 세포조직 배양 등을 통해 상당 부분 대체가 가능해졌고, 정교해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예상값을 측정하는 등의 방법으로 상대적으로 덩치가 큰 동물들, 특히 유인원 대상 실험은 사라지는 추세이지만, 유독 설치류에 대한 실험은 그 대상을 공급하는 게 하나의 ‘산업’이 될 만큼 활황 상태다. 아무래도 인간과 닮은 형상에다 친밀도가 높은 유인원에 비해 사회적 인식 면에서 현저히 낮은 평판을 가진 ‘마우스’에 대해선 그 효용에 더 주목하는 모양새인 셈이다.

동물 대상 실험에 찬성하는 이들은 우선 그 효율성에 주목한다. 인체 실험을 직접 하기엔 너무 위험성이 높지만, 신약이나 백신 개발을 위한 임상 절차는 반드시 필수이기에 필요악이라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규모를 최소화하고 기본적인 윤리규정을 준수한다면 ‘가치 있는 희생’으로 봐도 무방하며, 비인간 동물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인간(동물)의 구할 수 있는 생명을 포기하는 건 오히려 위선적이라는 입장이다. 아마 많은 이들이 ‘어쩔 수 없지 않냐?’는 태도로 무언의 긍정을 취할 법하다. 반대하는 이들을 ‘프로불편러’로 쉽게 치부해 버리는 경우도 종종 목격된다. 하지만 과연 그걸로 끝나는 문제일까? 단편 다큐멘터리 <마우스>는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영화 <마우스> 스틸 사진

◆ ‘시옽’과 ‘달연’이 세상의 모순에 직면하고 견뎌내는 방식

30분 분량의 단편 다큐멘터리 속에는 2명의 ‘인간-동물’과 다수의 ‘비인간-동물’이 등장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투룸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주거공간 안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쥐돌이’ 장난감을 빤히 응시하고 있다. 주위를 보니 작은 ‘마우스’ 털 인형도 보인다. 고양이와 마우스의 대치는 한참 이어지던 참에 고양이가 훌쩍 침대로 점프하면서 끝난다.

이어서 얼굴에 살짝 모자이크 처리를 한 ‘인간-동물’이 등장한다. 그는 고양이 집사이자 채식주의자이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동물실험 연구자로 종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문제적 인물, ‘시옽’은 자신의 모순된 처지, 그리고 처음으로 동물실험에 참여했을 때의 감각을 어렵사리 되살리기 시작한다. 첫날에는 너무나 두렵고 힘들었지만 둘째 날에는 어떻게 겨우 해냈다. 셋째 날이 되자 동시에 여러 실험동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다음부터는 점점 무덤덤해졌다는 증언이 힘겹게 이어진다. 좀 더 상세한 내용은 그가 ’잊기 위해‘ 꼼꼼하게 작성한 기록이 자막으로 화면에 새겨지면서 확인된다. ‘시옽’은 그저 시간이 지나면 견딜 수 있다는, 어쩌면 자신과 같은 체험을 묵묵히 수행하다 그저 무뎌지는 것으로 봉합하게 된 선배들의 격려(?)와 덕담이 그리 와닿지 않는다.

두 번째 ’인간-동물‘이 등장할 차례다. ‘달연’은 다양한 사회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활동가‘다. 이주노동자 단속 반대 집회와 성 노동자 지원 집회, 그리고 도축장에서 곧 죽임당할 가축들을 위한 위령제 등 여러 ‘현장’에서 펼쳐지는 그의 활동상이 화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적지 않은 동료들과 함께 ‘달연’은 열정적으로 구호를 외치고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느라 여념이 없다. 앞선 ‘시옽’과는 달리 인터뷰 자리에서도 그는 좀 더 적극적으로 임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세상의 온갖 모순에 맞서고 소외된 피해자들에게 전력으로 공명하는 그에겐 불의한 세상의 질서를 혁파하지 못하는 스트레스와 희생자에 대한 공감에서 기인한 불안감이 가득하다. 그 때문에 우울증약을 상시 복용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 약을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실험이 존속하고 있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그리고 ‘달연’은 그 상황을 명확하게 인지한다.

‘시옽’은 도망치려다 끝내 탈출하지 못한 채 대학원에 진학하고 인턴이 되었다. 처음엔 동물실험을 지켜보다 보조하게 되었고, 어느새 익숙해졌다. 어쩌면 둔감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임무 수행과 달리 여전히 그는 위액을 토하며 괴로움이 누적되는 중이다. 주사를 놓고 괴로워하는 인간화 마우스의 상태를 관찰하다가 숨이 끊어지면 시체를 수거해 처리한다. 그 순간에는 한때 생명체였던 존재는 숫자로 치환된다. 그렇게 무덤덤해지는 자신이 싫어 탈주를 모색하다가도 누군가는 이 업무를 맡아야 한다는 걸 직시하고 만다. 차라리 아예 무관심한 타인보다는 자신이 그 일을 수행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여전히 그는 ‘경추탈골(머리와 뒷다리를 손으로 잡아 늘이는 방식으로 척추를 끊는 방식)’로 비교적 덜 고통스러운 죽음을 제공하며 산다.

‘달연’은 도축장에 실려 온 트럭 안 빽빽하게 숨쉬기도 힘들어 뵈는 돼지들의 마지막 길을 추모하는 의식을 치른다. 돼지들의 목을 축이고 감자를 먹이며 조금이나마 편안하기를 기원한다. 아마 이 정도가 물리적 충돌 대신에 도축장 종사자들과 동물권 활동가들이 합의한 경계선일 것이다. 추모 행사를 치르고 둘러앉아 소감을 나누는 풍경이 먼발치에서 조명된다. 그는 도축장 직원들과의 대화 내용을 전하며 서로 미워하지 않는 관계라는 체험담을 소개한다. 돼지의 생명을 거두는 이들이지만 그들 역시 육가공기업에 종속된 노동자일 뿐이니 책임져야 할 당사자는 아니라는 이야길 나눴다며 현실의 복잡한 단면들을 찬찬히 설파한다.

▲영화 <마우스> 스틸 사진

◆ 21세기 대안으로 향하는 낯선 이정표가 돌출하는 순간

영화는 ‘수미상관’의 방식으로 상징화된 대치를 연결한다. 시작과 함께 등장했던 고양이 vs 마우스 장난감과 인형의 대립 구도는 결말에서도 여전히 고양이와 쥐돌이 인형의 대치로 연결된다. 세상의 모순이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귀결로 선택했을 법하다.

동물권에 대한 논의에서 종종 인용되는 책의 제목이 있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여기에서 얼핏 본다면 개 vs 돼지 vs 소의 처지는 사뭇 다르게 보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고대에 노예가 그랬던 것처럼 약간의 처우나 대접이 다를 뿐 ‘노예’로 종속되고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주인 혹은 지배계급의 필요와 목적에 철저히 종속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오로지 인간의 의도와 효용에 의해 가축화된 동물들의 운명은 결정될 따름이다.

그중 개가 제일 처지가 좋아 보이지만 인간 본위로 교배되고 분양된 후 부양이 곤란해지거나 인간 주인이 기대한 효용이 사라진 경우, (예를 들어 나이가 들거나 병들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신세다. 돼지와 소는 인간의 절대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육식 수요가 덩달아 상승하면서 생명체가 아닌 고기(+ 부산물) 질량으로만 치부되는 중이다. 여기에 그 절대 비중은 미미하기 짝이 없지만 ‘인간화 마우스’로 대표되는 설치류 종들 역시 철저하게 인간 본위로 강제 개량되고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이란 점에서 철저히 동일한 운명에 속한다.

이 문제에 관한 인간들의 입장 차이에는 철학적 인식의 대비가 결정적일 테다. 좀 딱하긴 하지만 인간이란 종 자체가 애초부터 ‘수렵’으로 육식하는 존재였다는 가설을 전제한다면, 비인간-동물은 오직 인간의 이용가치에 의해 규정될 운명의 존재다. 일정한 보호와 윤리적 관리라 할지라도 이 관점 내에서 적정하게 융통성을 발휘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다. (물론 최소한의 ‘연민’ 가치가 폄하될 순 없다) 인간-동물과 비인간-동물의 분리(이는 지배종으로서의 인간과 관리대상으로서의 비인간-동물 및 더 크게 나아가면 지구 생태계 전반) 및 수직 서열을 전제하는 태도로 귀결된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차별’과 ‘배제’가 기준인 관점이다.

반면에 영화 속에서 집회 도중 공연되는 ‘빌리카터’의 노래 ‘폭력종식’ 가사처럼 “비인간 동물도 우리가 연대해야 할 여성이고 퀴어이다.”라는 외침이 그 대척점에 존재한다. 영화 초반에 ‘달연’이 다양한 소수자 집회에 참여하며 연대하는 태도와 ‘통’하는 관점이다. 아마 기계적으로 여성주의/페미니즘을 사고하는 이들에겐 매우 낯선 구호일 테다. 하지만 21세기 현재 대안적 세계화와 진보(좌파)정치의 재구성을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익숙한 내용인 동시에 구현해야 할 통합성의 상징과도 같은 내용이 된다. 여성주의가 생물학적 여성의 권익 옹호에서 끝나지 않고 ‘마이너리티’들 간의 연대로 확장되는 순간, 노동-여성-생태-퀴어가 수많은 갈등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데 어울릴 가능성의 모색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긴 하지만) 하나의 시대정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물론 여전히 미완의 프로젝트이긴 하다.

◆ ‘마이너리티’ 소재 작업의 병목 정체를 돌파하려는 모색

그런 거대한 담론을 펼쳐내고자 감독은 의도적으로 두 명의 인간 출연자를 (실제 서로 만나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음에도) 마치 ‘버디 무비’ 더블 주인공, 혹은 거울의 양면처럼 보이게끔 이것저것 장치를 심어놓았다. ‘시옽’과 ‘달연’은 초반에는 서로 교차하며 등장하지만, 보고 있으면 점점 둘은 같은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합쳐지는 느낌이 조성된다. (게다가 ‘시옽’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가 많아 자연스럽게 윤곽이 흐릿해지는 효과도 있다) 가냘픈 체구의 두 인물이 조곤조곤 전하는 인터뷰 장면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둘을 분간하기 쉽지 않다. 감독의 노림수가 확실하다.

거기에다 비슷한 연령대의 독립생활 여성들에게 공통적인 주거환경 묘사가 더욱 묘한 기시감을 선사한다. 서로 다른 사연을 안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난관에 봉착한 이들 둘을 각자의 ‘공간’이 마치 원심력으로 회전하듯 묶어내 준다. 후반부에서 유사한 이들의 현재 주거공간을 마치 무대극의 양면 배치처럼 담아내는 장면들은 둘로 나눠진 분할된 세계의 압축이자, 둘의 처지와 고민이 서로 다른 단면일 뿐, 구조적으로는 하나의 쟁점에서 유래되었음을 이미지로 전하려는 메시지일 테다. 두 인간 주인공의 상호모순적인 동시에 보완되는 담론으로서의 일상의 고통이 인간-동물 전체의 ‘종’ 차원 고민으로 귀결된다.

근래 한국 독립영화에서 해당 주제, 비인간 동물의 권리나 채식주의(비거니즘) 관련 조명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정도로 사회적 시류와 함께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가 되었다. 해당 작업 창작자의 과반이 여성 감독이란 점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특징이다. 관련 분야 활동가들이 농담 겸 종종 던지는 것처럼, 채식 활동가 10명 + 여성주의 활동가 10명 + 동물권 활동가 10명 + LGBT 활동가 10명 모아 집회나 행사를 벌이면 전부 모여도 10여 명이라는 건 자조라기보다는 관련 의제들의 근접성을 확인하는 계기인 법이다.

하지만 대개 이런 부류 작업은 자신들의 소신을 펼치기에 그치곤 한다. 그래서 원래 비슷한 생각을 지닌 이들에게선 환영받지만, 반대편 입장에 선 이들에게는 또 하던 주장 그대로 ‘복ㆍ붙(복사해서 붙이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봉착한다. 게다가 본인들의 신념이 확고한 대신에 타인들을 설득하는 데엔 상대적으로 덜 집중하는 방향성 탓에, 우리 편 부흥회에는 더없이 유용하지만 비우호적인 이들에겐 외면당하기 일쑤다. 근래 한국 사회 보수진영이 주도하는 ‘백래시’ 열풍과 함께 ‘의지주의’ 차원의 격려용 문화가 힘이 되는 측면이 명백히 존재한다. 그런 경향이 일정하게 대항 행동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해당 부류 작업들은 향후로도 상당 기간 이어질 테다.

▲영화 <마우스> 스틸 사진

◆ 미래지향적 대안을 찾기 위한 첫 번째 이정표로서의 작업

하지만 거기에서 좀 더 확장된 고민과 중간지대를 아우르려는 손길을 겸비한 작업은 결국 등장해야만 한다. 민주주의 시민사회에서 양극단으로 치우쳐서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공동체의 파괴로 귀결될 운명이기 때문이다. 양적 성장과 물질적 편의에 치중해온 근현대 인류문명이 과도한 자원 소모와 환경 파괴로 치닫는다면 지속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상식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문제다. 하지만 한번 맛본 풍요와 편의를 포기하거나 억제하는 건 지금까지 ‘수요’란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만으로는 금방 빠져나오기 어려운 과제이기에, 대화와 토론을 거쳐 사회적 논쟁에서 합의점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더 많은 쟁점을 끄집어내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조금씩 공감대를 끌어올려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마우스>는 거대한 통합력을 끌어내기 위한 첫 단계를 과감히 도전하는 작업이다. 두 명의 인간 주인공이 교차하며 풀어내는 주제의식은 일정한 중력을 발생시키긴 하지만 단편 호흡 내에서 소화하기엔 중압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감독은 답습되고 있는 방식 – ‘우리의 행동이 옳다!’ 선언이나 혹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같은 연민 유발, 또는 백래시에 대한 분노 등속 –을 뛰어넘어 다음 단계로 향하기 위한 주제 확장과 그동안 간과되어온 비인간-동물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오만가지 난관을 짊어지려는 확고한 태도를 견지한다. 첫 작업치고는 주변 눈치 보지 않는 초심이 선명하다.

물론 이 작품이 아주 독창적인 형식이나 영상 문법을 선보이길 바라는 건 과도한 기대일 테다. 영화는 구성적인 면에서 인터뷰 중심에다 활동현장 스케치를 가미한 전형성을 드러낸다. 그런 일반적인 구조에도 불구하고 <마우스>가 복잡한 주제를 하나의 큰 그림으로 엮어내는 솜씨가 상당하다. 느린 톤으로 시종일관 흘러가지만 크게 늘어지거나 비약되지 않고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는데 성공적인 전개로 연속된다. 그렇게 안동 출신 감독은 영화 유학을 떠나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작업으로 심상치 않은 결과물을 선보였고, 이제 고향의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첫 상영을 기다리는 중이다.

<작품정보>

마우스
2023│한국│다큐멘터리│30분
감독/기획/촬영/편집/음악 서주희
출연 시옽, 달연, 크리미, 마우스, 돼지들

2023 49회 서울독립영화제 단편경쟁 우수작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