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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2.3 윤석열 내란 사태’로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무도한 자에게 권력을 내어주었을 때 국가시스템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처절한 경험을 하며, 대한민국은 다시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21세기의 민주주의는 형형색색, 각양각색의 응원봉처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뉴스민>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에서 응원봉을 든 그들, ‘민주주의자’들을 만나고, 기록한다.
4일 토요일, 대구 중구 CGV대구한일 앞에서 옛 대구백화점 앞 분수대까지 이어진 대열의 끝에 그가 서 있었다. 달서구에 사는 이은진(33, 환경교육사) 씨는 매주 윤석열퇴진 대구시민시국대회(시국대회)에 나오는 ‘프로 참석러’다. 이날도 혼자 깃발을 들고나왔다. 손에 단단히 쥔 깃발에는 검은색, 노란색, 보라색의 기다란 천이 순서대로 매달렸다. 그는 세 장의 천이 서로 얽힐까 계속해서 깃발을 좌우로 흔들었다.
이 씨는 한 주 전인 12월 28일 처음 깃발을 들고나왔다. 그때만 해도 깃대 끝에는 노란색, 보라색 천만 달려 있었다. 노란색은 세월호 참사, 보라색은 이태원 참사를 의미했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모두 국민의힘이 여당일 때 벌어진 참사이기 때문에 이 씨에겐 ‘윤석열 퇴진’만큼이나 ‘국민의힘 해체’가 중요한 이슈다.
처음 깃발을 들고 집회에 나왔을 때만 해도 그는 검은색 천을 추가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12월 29일 오전 9시 3분 무안국제공항에서 탑승자 181명 중 179명이 숨지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이 씨는 참사 소식을 실시간 뉴스로 보면서 마음을 졸였다. 31일 대구시가 달서구 두류공원 내 안병근올림픽기념유도관에 합동분향소를 마련한다는 뉴스를 보고 그날 바로 다녀왔다. 이 씨는 “오늘도 대백 앞에 분향소가 차려졌다고 해서 들를 생각이었는데, 이미 끝난 다음이라 아쉬웠다”고 덧붙였다.
세월호 참사는 이 씨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2014년 당시 그는 목포에 살고 있었다. 사고 영상을 보고선 ‘뉴스에, 정치에 관심 없이 살면 안 되겠구나’ 자각했다. 박근혜 탄핵 집회에도 꼬박꼬박 나갔다. 현재진행형인 12.3 윤석열 내란 사태에서도 할 수 있는 걸 고민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오송 참사, 그리고 제주항공참사까지 반복되는 대형 참사를 기억하고 진상 규명을 통해 재발을 막아야 한다는 건 곧 정치의 문제다.
이 씨는 “그래도 시민들이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발 빠르게 마련되고, 유가족 모욕글에 경찰이 대처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 10년 전보다는 우리가 나아졌다고 생각했다”며 “오늘 시민대회에 나와서도 함께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니 마음이 좀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 대구의 단면들을 마주할 때면 힘들기도 하다. 며칠 전 이 씨는 서문시장으로 깃발에 매달 천을 사러 갔다가 상인 몇몇이 모여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월호는 나라가 책임질 게 아니”라거나 “이재명은 안 찍지” 같은 말을 듣곤 가슴 한편이 답답했다. 정치에 관심 없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뉴스를 보며 힘들어하는 스스로가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비상계엄이 처음 선포된 날은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불안하고 일이 손에 잘 안 잡힌다. 좀 괜찮다 싶다가도 뉴스를 보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실이 보이니 화가 난다. 대구는 홍준표라는 암 덩어리가 있지 않냐. 그래도 시민대회에 나와서 함께 구호를 외치고 발언하는 분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다 보면 그런 마음이 좀 나아진다. 그래서 매주 나온다.”
김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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