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문제 해결은 인간의 존엄을 위한 투쟁”

세월호를 기억하는 대구사람들 이야기 (8) 송필경, 최호선 선생님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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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재해 같았던 한여름 더위가 가시고, 이제 얼마 있으면 추석이, 그리고 세월호 참사 900일도 다가온다. 세월호 선수 들기는 성공했지만, 팽목에는 미수습자 가족들이 하루하루 피 말리는 심정으로 선체 인양을 기다리고 있다. 광화문과 민주당사에는 유가족들이 특별법 연장과 특조위 활동보장을 요구하며 보름 넘는 무기한 단식과 당사 점거농성을 진행했다. 이에 대구에서도 지난 25일부터 세월호유가족들과 함께하는 동조단식을 시작했다. 한편 대구 인근 성주와 김천에서는 미사일(사드)배치를 막으려는 국민들이 나서서 자신의 안전과 권리를 위한 싸움을 쉬지 않고 하고 있다.

▲왼쪽부터 송필경, 최호선 선생님. 2016년 8월 17일 인터뷰 중, [사진=김선우]
▲왼쪽부터 송필경, 최호선 선생님. 2016년 8월 17일 인터뷰 중, [사진=김선우]

유가족들이 단식 농성을 시작하기 며칠 전인 8월 17일 세월호 참사 이후 꾸준히 함께 활동한 송필경 선생님(범어동/생각하는치과 원장)과 최호선 선생님(시지동/심리학자, 호떡고민상담소 소장) 두 분을 만났다.

송필경 선생님은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와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 활동을 꾸준히 해 오셨고, 근래에는 두목회(두번째 목요회)라는 단체 이름으로 다양한 강좌를 열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한 강연도 열고, 우리지역 활동에도 늘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가해 오셨다. 최호선 선생님은 세월호 참사 직후인 4월 29일부터 일주일간 팽목에 머물며 참사로 희생당한 분들의 시신을 존엄하게 보내드리기 위한 자원봉사를 하셨고,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도 가족들의 고통을 나누기 위한 여러 노력을 하고 있다.

먼저 세월호 참사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던 날 마침 베트남에 가 있어서 배가 기울어진 것을 방송으로 보았고, 귀국해서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는 송필경 선생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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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필경 선생님

“개인적으로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가 났을 당시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시민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그때 여러 가지 가슴 아픈 일이 있었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26살 청년이 마지막 순간 애인에게 ‘나는 지금 죽고 있어요’라는 문자를 보낸 일입니다. 독한 가스로 그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런데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분들은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어쩌면 길게는 10시간씩 견디다 숨졌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아이들을 한 명도 구해내지 못했다는 것은 도대체 있을 수도 없고,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하철 참사 희생자들이 2~3분 만에 숨진 것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할 정도로 기가 막힌 일이지요. 배는 뒤집히고, 핸드폰도 안 되고, 선실에 갇혀서 아이들이 서서히 죽어갈 때 어떤 고통에 놓였겠는가, 생각만으로도 엄청난 분노가 솟구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래서 이 일은 어떻게든 끝까지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최호선 선생님의 이야기는 옮겨 쓰는 지금도 마음이 아픈 이야기였다.

▲최호선 선생님
▲최호선 선생님

“세월호가 침몰하던 4월 16일 수요일 아침 첫 시간에 강의가 있었는데, 강의 끝나면 다 구출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마도로스였기 때문에 배에 대한 경험이 많은 편이라 방송으로 침몰 상태를 봤을 때 다 구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당시에는 국민이면 누구나 여당, 야당 가릴 것 없이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렸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 명도 구하지 못하고 다 잃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일을 겪은 우리 세대의 공통점이 무기력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29일 팽목에 갔어요. 가던 날 9명이 올라왔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을 많이 보는 일을 하니까 그때면 시신 상태가 어느 정도일 거라는 짐작을 하면서 갔는데, 제가 처음 본 남학생은 참혹한 상태였어요. 그렇게 애들을 받으면서 제가 했던 약속 때문에 이후에도 계속 무엇인가를 했고, 여기 이 자리에도 나와 있을 거예요. 사람이면 다 마찬가지일 텐데 애들이 올라올 때마다 ‘내가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꼭 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리고 이후에는 정말 별일을 다 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처음 그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제게는 세월호 참사가 남의 일이나 뉴스가 아닌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지금까지 오고 있는 거지요.”

송필경 선생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개인적인 소회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세월호 참사 진상을 규명하고 안전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일의 사회적 의미와 과제에 대한 것으로 나아갔다.

“나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한 번도 윤리적 완성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우리 사회 전체의 윤리와 책임을 바로 세우는 중요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돌아보면 소위 집권층이 국민적 사안에 대해 책임을 제대로 진 적이 없었습니다. 임진왜란부터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질 테니 생략하겠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30년 뒤에 일어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당시에는 청나라가 세계적으로 앞서가던 시기로 광해군이 청과 외교를 원만하게 풀고 있을 때였지요. 그런데 이런 상황이 대대로 명나라에 자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세력에게는 손해가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당시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멸시했습니다. 이에 대한 응징으로 청나라가 조선을 친 것이지요.

다들 잘 알다시피 이때 우리 왕이 청 태종(재위 1626-1643) 앞에 꿇어앉아서 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맨땅에 이마를 세 번씩 찧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것은 청이 20만 명의 조선 아녀자를 끌고 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집권층은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 여성들을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불렸습니까? 화냥년(환향녀)라고 멸시했습니다. 당시 집권층인 사대부들이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고 청을 멸시하고 무시하다가 동양에서 가장 뒤떨어진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었습니다. 그런데 집권층은 오히려 자신들의 무능과 죄악을 20만 명의 억울한 조선 아녀자들에게 덮어씌우고, 교묘하게 이슈를 만들어 자신들이 져야 할 책임을 하나도 지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권력층이 그대로 서인으로 살아남고, 매국하고 친일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 우리 역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집권층이라는 사람들은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세월호나 사드배치나 다 똑같은 문제입니다. 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그만큼 죽었으면 장관부터 시작해서 대통령까지 사과하고 책임져야 하는데, 오히려 더 뻔뻔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유족들을 갈라치기하고, 한 사람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동안 역사를 거치며 우리 국민들의 의식도 이제는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끝까지 싸워서 우리 사회 전체의 윤리의식과 책임의식을 제대로 한 번 세우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놓치지 않고 끝까지 붙들고 나가서 정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게 해야 우리민족의 본때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저는 이렇게 세월호 활동을 하고 계신 분들이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최호선 선생님 이야기는 또 다른 측면에서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잘 해결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깊이 고민하게 했다. 개인을 위해서도 우리 사회 전체의 오늘과 미래를 위해서도.

“저는 요즘도 학생들한테 편지를 많이 받아요, 당시 세월호를 탔던 단원고 아이들하고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많아요. 우리의 일상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흘러가지만, 특히 그 나이 때 아이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던 거예요. 슬픔보다는 충격이 일차적인 거죠. 편지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면 학교에서는 나라나 경찰이 국민을 보호하고, 국민은 의무를 다한다고 배웠는데,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사회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걸 봐 버린 거죠. 이건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이에요. 사춘기 아이들에게는요. 편지를 보낸 아이 중에 ‘멀쩡한 교실 창문으로 물이 들어오는 것 같다’는 아이들이 있다니까요. 사실 어른들은 나이가 있으면 그런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능력이 좀 생겨요. 그러나 17살 아이들한테는 엄청난 충격인 거죠.

저는 이 아이들이 사회와 어른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되게 무서워요. 대구에 사는 한 아이였는데, ‘노란 리본 달고 집에 가서 엄마한테 내가 세월호에 있었어도, 엄마 그렇게 말할 거야’라고 물어보고 싶었다는 메일을 보내온 아이가 있었어요. 그 아이가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고, 소름이 끼쳐요.

또 다른 측면의 사례인데 배에서 마지막 순간에 선생님한테 전화를 한 아이들이 많았어요. 초등학교 선생님한테. 심리적으로 의지할 곳이 부모가 아니라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이들이 있었던 거지요. 지금도 저랑 연락하는 분들이 몇 분이나 계셔요. 이런 선생님들 이야기 처음 들으셨죠? 이 선생님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어요. 아이들의 마지막 전화를 받았다는 것과 슬퍼하는 부모님들이 있는데 내가 슬프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 그래서 지금도 정신과에 다니는 분들이 있어요.

이렇게 보면 세월호 참사는 사고의 희생자나 가족만의 문제가 아닌 거죠. 교사, 안산지역 사회, 우리 사회 전체, 모두의 오늘과 미래의 문제인 거예요. 그런데 이걸 보상금이 얼마다 이런 식으로만 이슈를 몰고 가버리면 제일 무서운 것은 다음 세대인 우리 아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과연 우리한테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에요. 이게 제일 무서워요. 사실은.”

최호선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 사이에는 한 번도 끊어지지 않던 이야기가 끊기고. 짧지만 깊은 침묵이 흘렀다. 세월호 참사가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고, 이대로 유가족들의 고통이 치유되지 않고 묻혀 버린다면, 우리 사회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2014년 4월 16일, 방송을 통해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그 안에서 서서히 숨져가는 희생자들을 한 명도 구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던 사람들은 일부 특정 지역이나 계층의 사람이 아니라 국민 모두였다. 어른들은 죄책감과 무기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이들은 절망과 원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바닥에 억눌린 채 흐르는 이 음울한 무기력과 분노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일상을 점령하고 튀어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무거워진 마음을 읽고 말문을 열어주신 분은 송필경 선생님이었다.

▲8월 25일, 대구동성로, 세월호 가족과 함께하는 대구시민동조단식 기자회견
▲8월 25일, 대구동성로, 세월호 가족과 함께하는 대구시민동조단식 기자회견

“지난 총선에서 야당이 이겼습니다. 현재 우리사회 언론의 98%를 조중동이 잡고 있어요. 목욕탕이나 이발소나 온통 조중동이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어버이연합을 보면 돈도 자금도 엄청 확보하고 있고요. 집권층이 가진 자본이나 언론장악력을 생각해보면 총선에서 압승했야 하는데, 수도권에서 참패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국민의 의식이 변화하고 있고, 민중이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서서히 민중의 인식이 전체적으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세월호 활동도 자세히 보면 부족한 사람들, 사건들이 있지만 결국 보세요, 국민적 염원과 관심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재난이 일어나면 마녀사냥을 일으켜 문제를 희석시키는 짓을 일삼던 지배권력에 저항한 인간의 역사가 유럽의 근대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사회 전체의 윤리와 책임을 바로 세우고 근대적 가치, 보편적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세울 시기가 됐습니다.

미국과 비교해서 1000:1의 역량을 가졌던 베트남이 전쟁에서 미국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전쟁이 인간의 존엄을 위한 투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인간의 죽음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인간의 존엄에 관한 문제이며, 현재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입니다. 총선이 끝난 후 이재명 시장이 ‘우리 시대 첫 번째 과제는 세월호다’라고 이야기했고, 조국 교수는 ‘이런 꼴 안 보려면 정권교체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사회는 일제강점기와 냉전체제를 거치면서 다양한 가치판단으로부터 나오는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아시아에서 굉장히 발달한 사회이며 무엇보다도 서서히 국민의 인식이 전체적으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매우 가슴 아픈 일이지만, 우리 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건입니다. 우리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세월호 문제를 정말 잘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향후 부도덕하며 정의롭지 못한 자들이 다시는 정권을 잡지 못할 것입니다.”

▲사드배치철회성주투쟁위원회에서 만든 파란 평화나비와 세월호 리본 고리, 군청앞집회 사회자와 발언자 가슴에 달린 리본들. [사진=성주투쟁위]
▲사드배치철회성주투쟁위원회에서 만든 파란 평화나비와 세월호 리본 고리, 군청앞집회 사회자와 발언자 가슴에 달린 리본들. [사진=성주투쟁위]

이어 최호선 선생님은 지금 사드배치를 반대하는 성주군민들이 잘 싸우고 있는 바탕에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세월호 참사가 깔려 있다는 이야기를 해서 우리는 모두 공감을 표했다. 동석한 김선우 세월호참사대구시민대책위원회 상황실장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최호선 선생님 말씀대로 지난 2년을 돌아보면 우리 국민 모두가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물었고, ‘가만히 있으라’고 배웠던 것에서 벗어나고 극복하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의역 청년노동자의 사고사나 강남역 여성 혐오살인에 대해서도 국민들이 이제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각자의 방식으로 말하고 요구하는 것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는 게 보입니다.”

이어진 김선우 상황실장의 이야기는 우리의 고민을 발전시켰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사람들이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도 세월호 활동을 하면서 현대사회 참사를 통해 만들어진 트라우마를 풀려면 사회적 해결 과정, 재사회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지난 2년 동안 가족들도 분노하고 싸우고 본인들이 주체로 나서는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치유하기도 하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도 그 과정에서 치유와 위안, 학습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이 딱 막히는 시점인 거예요. ‘2년 넘게 싸웠는데 바뀌는 게 없구나’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조금 더 힘을 내야지’하는 분들도 계실 텐데, 지금이 딱 뭔가에 막혀있는 시점이라는 느낌은 다 같지 않을까 합니다. 세월호 문제를 풀려면 여기서 무언가 달라져야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을 텐데, 기존의 틀과 사람과 방식으로는 매우 부족하구나, 그게 무엇일까 고민이 많이 드는 요즘입니다.”

이에 대해 최호선 선생님은 두 가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첫째는 ‘송필경 선생님 말씀대로 우리 사회가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 끝까지 책임을 지고 죗값을 치르는 경험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세월호 활동을 전체적으로 재정비해야 할 시점이 지금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시민사회단체나 SNS활동가의 순기능이 매우 크고 훌륭하지만, 한편으로는 역기능을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확대 재생산하거나, 가족들이 밝히지 않은 사실을 먼저 유가족 입장인 것처럼 나서서 유가족보다 먼저 움직인다거나 과잉공명심에 사로잡혀 국민들이 오해할 수 있는 과도한 언사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난 시기 어떤 측면에서는 스스로의 활동도 그러한 면이 없었는지 성찰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팽목에 걸려 있는 세월호인양촉구 현수막
▲팽목에 걸려 있는 세월호인양촉구 현수막

둘째는 당사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사회 구성원 전체가 ‘재사회화’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호선 선생님은 900일 가까운 동안 딸의 얼굴을 보지 못한 미수습자의 엄마가 세월호 인양을 위해 투입된 중국선원들이 배에서만 생활하고 있는 것에 마음 아파하며 편지를 보내겠다고 한다는 말했다. 고통의 당사자들이 슬픔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고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과정을 통해 달라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이야기다.

팽목에 가면 미수습자 가족들이 세월호 인양을 요구한 내용이 현수막으로 걸려 있다. 유실 없는 온전한 인양, 그리고 작업자들의 안전. 이 대목에서 가슴이 뭉클하고 아팠던 기억이 살아났다. 그리고 성주군민들이 사드배치 앞에 피해자가 되어 움츠리거나 징징대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요구하고 싸우는 것, ‘사드배치 성주만 아니면 된다’가 아니라 ‘한반도 어디에도 사드는 안 된다’고 외치는 것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두 선생님과 우리는 지난 815 대통령 축사, 친일파 아버지도 그 딸도 대통령을 하는 나라에 사느라 화병이 도무지 낫지를 않는다, 한 번도 제대로 응징하지 못했던 우리 역사, 치유의 과정으로 가려면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서 무조건 응징할 사람을 응징해야 한다, 응징과 복수는 다르다 등 여러 이야기와 소회를 나누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최호선 선생님은 “세월호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느냐가 우리 사회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고 시금석일 것”이라며 “세월호 문제는 우리 모두의 존엄에 대한 문제, 이미 다 끝난 일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존엄까지 지키는 일”이라고 말씀했다.

송필경 선생님은 “세월호 문제가 사드 문제고, 사드 문제가 천안함 문제다, 인륜의 문제인 세월호 싸움을 여러분들이 끝까지 관심을 놓치지 않고 싸우는 것처럼 나도 어떤 방법으로든 함께 하겠다. 사람이 사회를 볼 때 돋보기로도 보고 망원경으로 본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같이하면서 세월호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며 “끝까지 좀 해 주이소~”를 거듭 당부했다. 김선우 상황실장과 나는 덜컥 “예”하고 대답해 버렸으니ㅎㅎ…이제까지처럼 여전히 걸어갈 일만 남았다.

지난 8월 미수습자 가족들을 뵙고 온 날 팽목 바다의 석양과 물빛은 무심하게 아름다웠다. 유가족들이 사생결단하는 심정으로 시작한 광화문 단식농성장에도 석양이 지고, 가을바람이 불어 흐를 것이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참사가 일어나고 2년,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가족들의 고통이 가장 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바람도 하늘도, 하루하루 흐르는 세월도 원망스러워지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사실 가장 절망스러운 존재도 사람이고, 가장 아름다운 존재도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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