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1987] (7) 감방에서의 단식투쟁

17:24

에피소드 1. 이○○의 어택, 스트리킹

하루는 관구 부장이 나에게 한숨을 쉬면서 하소연을 해왔다.

“이○○ 너무한다”
“왜요?”
“글쎄 옷을 홀랑 벗고서 관구실로 달려와 탕반기-목욕탕 바가지-에 담긴 짬밥을 던졌다.”
“아무것도 안 입고요?”
“그래”
“덜렁덜렁거린 채로요?”
“그래”
“뭐 때문에요?”
“밥에 모래 들어갔다고”
“교도소가 잘못 했네”
“그게 우리 잘못이가. 오늘 오전에 바람이 많이 불어서 밥을 운반하다 모래가 들어간 걸 어쩌란 말이고”
“아 그럼 갸가 잘못 했네, 짜씩이 정치범으로 품위를 지켜야지”

평소 나의 방정한 품행을 잘 아는 교도관이 멍하니 쳐다본다.

“왜요?”
“아니”

에피소드 2. 이러다간 굶어서 뒈지겠다.

무슨 일인지는 잘 기억 나지 않는데 좌우지간 누가 단식투쟁을 하자고 했다. 순진해서, 정말로 순진해서 단식투쟁은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물을 포함해 아무것도 먹지 않고 꼬박 3일을 버텼다.

교도소에서는 같은 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는 눈치였다. 그래서 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감방장이 나보고 두유 같은 것은 먹으면서 해야 한다고 꼬드겼지만, 그리고 그 유혹에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놈의 가오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교도소에서도 겁을 먹고 빨리 항복을 하기는 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가 들어온 후 많은 이들이 시국사건으로 교도소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우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단식투쟁을 하자고 했다. 자기들은 처음이겠지만 계속 있던 우리들은 한 달이 멀다하고 단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러다간 굶어 뒈질 지경이었다. 머리를 굴렸다. 단식투쟁은 패배주의적이고 비겁한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그렇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투쟁할 방법들은 얼마든지 있다고 설득했다. 그러고는 때려 부수는 방식으로 싸우라고 했다. 패배적으로 싸우기 싫으니 굶으려면 니들이나 굶으라고 했다.

그렇게 교도소에서 투쟁도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어떤 선배는 퐁퐁통에 오줌을 넣어놨다가 ‘백대가리’라고 불리는 교도소 보안과장이 오자 물총처럼 쏘아대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선배는 성주촛불에 자주 출몰하는 변○○ 선배이다.

에피소드 3. 일가를 이룬 대구의 소매치기 집안

같은 사동에 있어 친하게 지내던 이가 있었다. 소매치기였다. 내가 있던 사동에서 감방 밖으로 나가서 자유롭게 복도를 돌아다닐 수 있는 인물은 나와 그, 그리고 해골이라는 별명을 가진 양아치 대장이었다.

한번은 90년도 초반에 내가 충환이 형(현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위원장)의 도움을 받아 비디오가게를 열자 양아치들이 삥을 뜯으러 왔다. 내가 그들에게 해골을 아느냐고 했더니 약간 놀라며 어떻게 아느냐고 했다. 그래서 잘 아는 형이라고 했더니 순순히 물러갔던 적도 있었다.

소매치기와 친해져 나는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는 소매치기들 사이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쌍둥이 형제인 그와 동생, 그리고 여동생, 부모님 모두가 소매치기였다. 가히 소매치기로 일가를 이룬 집안이었다. 그가 남자사동에 있을 때 여동생은 여자사동에 잡혀와 있었다. 하루는 복도 계단에 앉아서 소매치기 기술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물었다.

“형은 실력이 어느 정도고?”
“나야 지갑을 빼서 돈만 뺀 다음 택시비 만 원 정도 넣어서 지갑은 다시 주머니에 넣어준다. 그라면 집에 가서 지갑 열어볼 때까지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그가 나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신입이 복도를 지나쳐갔다. 그러더니 그에게 인사를 구십 도로 했다.

“형님, ○○형님 밑에 있는 ○○○입니다.”
“그래 니 뭐했노?”
“예 기술잡니다.”
“이 해봐라”
“우리식구 맞네.”
“이 보면 아는교?”
“그래 쟈들은 금목걸이 딸 때 이빨로 딴다.”

그는 소매치기 가문의 최상층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출소 2개월 남겨놓고 난동을 피워서 추가로 5년형을 더 받은 일화 때문에 유명했다.

교도소 처우에 불만을 제기했는데 들어주지 않자 교도소 보안과장을 면담한 자리에서 교도소 안에 ‘히로뽕’을 들여왔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놀란 보안과장이 어디 있냐고 묻자 종이에 싸인 히로뽕을 가져다 내밀었고, 놀란 보안과장이 그것을 세면대에 털어 넣은 후 물을 틀어버려 증거를 인멸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밖으로 알릴 길이 없자 몇 명이 흉기를 들고 교도소 사동을 점거하고 대치하다가 교도관이 찔리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다시 추가 기소되어 검사를 만난 자리에서 그 ‘히로뽕 사건’을 검사에게 불었다고 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교도소장, 보안과장 등 많은 수의 교도관들의 목이 날아갔다.

“진짜로 히로뽕이 있었는교?”
“그래 밖에서 몰래 들여왔다.”
“그럼 그걸 갔다가 줬는교?”
“언제 다 쓰고 없었다.”
“그럼 뭘 가져다줬는데요?”
“미원 가져다줬지”

이게 맞는 이야기라면 정말로 황당한 사건이었다. 사실 히로뽕과 화학조미료는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구분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정말로 히로뽕이 들어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화학조미료 때문에 그 사달이 난 것은 틀림없었다. 그 뒤로 교도소에서는 그들 쉽게 건들지 못했다.

그의 밑에 있던 중간급 정도 되는 소매치기도 같은 사동에 있었다. 그와 같이 운동하다가 그에게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평균 잡아 한 달에 삼백만 원 정도 될 거라고 했다. 당시로 삼백만 원이면 상당한 고소득이었다. 하지만 그가 푸념하면서 이야기한다.

“근데 인생의 반은 교도소에서 살아야 한다.”

출소 후 버스를 타게 되어 경험한 일이 있었다. 소매치기들의 행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은 후라 그런지 소매치기들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내가 그들을 째려보면 그들도 나를 째려보다가 버스를 내리곤 했다. 그때야 젊은 혈기로 그랬지만 지금은 턱도 없는 일이다. 비겁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