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디지털 안 배우는 실리콘밸리 2세들, 기술 중독 사회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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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구 4명 중 1명꼴인 20억 명 이상이 이용하는 페이스북의 폭발적 성장은, ‘좋아요’ 버튼의 힘이 크다. ‘좋아요’ 버튼은 페이스북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독보적인 지위를 누려왔다. 과연 우리가 ‘좋아요’ 없는 페이스북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저스틴 로젠스타인은, 페이스북 초창기에 ‘좋아요’ 버튼을 고안한 개발자다. 누구보다도 ‘좋아요’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좋아요’의 유혹을 두고, “가짜 즐거움의 맑은 종소리(bright dings of pseudo-pleasure)”로 빗댄 것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Our minds can be hijacked’: the tech insiders who fear a smartphone dystopia, 가디언 2017. 10.6.) 가디언의 이 기사에서 로젠스타인은, 자신은 이제 페이스북뿐만 아니라 스냅챗이나 레딧과 같은 소셜미디어에 철저한 제한을 걸어두고 최소한의 시간만 사용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인도적 기술 센터’, 내부자들의 반란?

로젠스타인은 페이스북 초기 투자자인 로저 맥나미, 페이스북 전직 임원이었던 데이브 모린, 구글에서 윤리 담당자로 일했던 트리스탄 해리스 등과 함께 최근 ‘인도적 기술 센터(Center for Humane Technology)’를 창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지난 2월 4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언론들은 인도적 기술 센터가 ‘기술에 관한 진실(The Truth About Tech)’이라는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어린이들의 안전한 기술 사용과 미디어 교육에 힘쓰고 있는 미국 비영리단체 ‘커먼센스’의 후원으로 시작한 이 캠페인은 주로 소셜미디어의 부작용을 대중에게 알리고 거대 IT기업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법률로 제한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트리스탄 해리스는 이에 대해 “우리는 내부자였다”며, 자신들은 거대 IT 기업의 작동 방식과 개발과정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해리스의 이 같은 발언은,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어떠한 방식으로 소비자(사용자)들을 유인해 왔는지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어서 더욱 주목을 끌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페이스북 공동창업자였던 션 파커나 전직 페이스북 사용자 담당 부사장이었던 차마스 팔리하피티야의 폭로와 증언이 이미 나온 바 있다. 파커는,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의 목표가 인간 심리의 취약성을 이용해 최대한 사용자의 시간과 관심을 붙잡으려는 데 있다고 폭로했다. 팔리하피티야 역시 페이스북이 중독 상황을 만들어 사용자의 도파민 분출을 유인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우리는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파괴하는 도구를 만들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거대 IT기업 종사자들이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르는 불이익과 비난을 무릅쓰고 이처럼 몸담았던 기업 조직에 전면적으로 반기를 들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자칫 지금껏 이루어온 것을 전면 부정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거대 기업에 맞서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어렵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들이 이 같은 행동에 나서게 된 것은 그만큼 소셜미디어를 비롯한 디지털 사회의 기술 중독 현상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기술 중독의 심각성

기술 중독의 심각성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서 더 거세지고 있다. 주류 경제인들의 모임인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서조차 페이스북(소셜미디어)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발언이 나왔다.

미국 소프트웨어 전문업체 세일즈포스닷컴 CEO 마크 베니오프는 “담배산업을 규제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페이스북을 규제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술이 가진 중독성에 주목해야 하며, 이러한 중독성이 강한 기술산업에 대한 규제가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베니오프는 기술 관련 업계에서 꽤 영향력 있는 전문경영인으로, 그의 발언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실제로 페이스북은 최근 ‘메신저 키즈’ 앱을 출시했다가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메신저 키즈’는 부모가 승인한 상대에 한해서만 문자나 영상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한 어린이용 앱이다. 페이스북은 자녀가 폭력적이거나 부적절한 콘텐츠에 노출되지 않게 보호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미국 어린이 온라인 개인 정보 보호법(COPPA)’에 위반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으나, 미국 내 아동보호단체와 시민단체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들은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에게 보낸 항의 서한에서, 소셜미디어 사용과 10대 청소년 우울증 사이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자료를 제시하며 어린이를 소셜미디어 서비스에 노출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하고 부적절한 처사라고 경고했다.

관련 업계에서도 ‘메신저 키즈’를 13세 이하 어린이는 페이스북 계정을 생성할 수 없게 한 COPPA의 규정을 교묘하게 피해 6~12세 어린이를 잠재적 고객으로 확보하려는 페이스북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있다. 최근 페이스북은 10대 청소년과 젊은 계층 사용자가 크게 감소하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애플의 CEO 팀쿡 역시 자신의 조카에게는 소셜미디어를 허락하고 싶지 않다고 밝히면서 기술 중독과 남용에 대해 경계하는 심경을 전했다. 그는 어린이들을 보호할 책임감을 갖고 자사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기기들을 통제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하겠다고 강조했다. 팀쿡의 이 같은 발언은 최근 투자자들이 어린이 스마트폰 중독에 관해 애플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실리콘밸리의 발도르프 학교

루돌프 슈타이너의 사상과 정신에 입각한 발도르프 교육은 아이들의 전인적 성숙에 목표를 두고 자연, 예술, 학문의 조화로운 배움을 추구하는 교육으로 알려져 있다. 발도르프 교육은 일정한 시기까지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는 교육을 철저히 금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발달 단계상 디지털 기기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매우 위험하고 해롭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발도르프 교육이 중시하는 인간의 의지, 감각, 사고의 조화로운 발달은 사람, 자연, 예술의 교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발도르프 교육은 인지적 영역에 편향된 교육마저 거부한다. 하물며 인지적 발달 교육보다 훨씬 더 공학적 교육 방식인 디지털 활용 교육을 발도르프 교육에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다. 요즘 같은 첨단기술 시대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매우 독특할지 몰라도 발도르프 교육 본연의 특성에 비추자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사실이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발도르프 학교. [사진=미국 CBS 영상 갈무리]

그런데 첨단기술의 메카 실리콘밸리에도 이와 같은 발도르프 학교가 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발도르프 학교는 학부모의 75% 이상이 첨단 IT기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과 상반된 지점에 있는 교육을 선택했지만, 이를 모순으로 생각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은 어린 시절 디지털 기기에 노출되는 것이 아이의 발달과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 시기에 자유로운 교육이 이루어져야만 상상력과 창의성도 길러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이유로 실리콘밸리의 발도르프 학교는 이미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2011년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이래 미국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첨단기술 시대에 더욱 중요한 가치를 교육하는 곳으로 소개된 바 있다. 교육의 특수성 때문에 널리 보급되고 확산되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기술 중독 사회에서 발도르프 교육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시간이 갈수록 더해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기술 중독 사회’를 넘어서

앞서 소개한 사례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심각한 기술 중독 사회라는 점을 일깨운다. 여전히 기술사회의 장밋빛 미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경향이 압도적인 현실에서 관련 분야 종사자들의 이 같은 움직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하지만 기술 중독 사회에 맞서는 이들의 방식이 근본적인 해결을 향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들은 마이크로소프트 인도연구소 창립자였던 켄타로 토야마가 자신의 책, 『기술 중독 사회』(유아이북스, 2016)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갱생 중인 기술 중독자”일지도 모르겠다.

토야마는 이 책에서 “첨단기술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회의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그는 기술이 이루어낼 사회 변화에 대한 “그릇되고 지나치게 낙관적인 믿음”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토야마는 자신이 유수한 기술전문가이면서도, 기술 자체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점을 이 책에서 명백히 밝히고 있다.

“강력한 백신이 있었지만, 소아마비를 퇴치하기 어려웠던 것은, 세상이 디지털 장치로 가득하지만 우수한 품질의 교육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과 같고, 이는 인권법이 있지만 뿌리 깊은 편견이 남아 있는 것과 같으며, 선거가 있지만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장애 요소가 존재하고, 환경보호기술이 있지만 기후변화에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과 같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수많은 패키지 개입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 보다 필요한 건 올바른 생각과 의지다.”(위의 책, p310)

그러나 토야마의 생각 일단에는 여전히 기술이 해결책이라는 전제가 짙게 깔렸다. 위에서 나열된 백신, 디지털 장치, 인권법, 선거, 환경보호기술, 수많은 패키지는 세계를 구원할 기술적 역량을 의미한다. 물론 그가 힘주어 강조하는 점은 이러한 기술적 역량을 활용해 세계를 구원할 주체인 우리의 ‘올바른 생각과 의지’에 집중되어 있긴 하다. 그의 논법으로 보자면 우리는 이미 세계를 구원할 기술을 갖고 있고, 세계를 구원할 주체의 각성만 있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지금 우리가 마주한 문제가 이처럼 단순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토야마는 현재 우리 사회를 ‘기술 중독 사회’라고 진단하면서도 ‘기술 중독 사회’의 근본악으로서 기술 문제를 바라보지 않는다.

기술을 낙관하거나 맹신하는 부류를 비판하지만 결국 그들의 해결책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결론에 도달한다. 파국으로 치달아 가는 산업사회와 기술 자체의 속성에 착안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세계를 ‘기술 중독 사회’라고 명명하고 있지만, 그로 인한 고통과 재앙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기술을 올바로 사용할 주체가 될 수 있느냐에 있을 뿐이다.

기술을 올바로 사용할 주체가 되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한계와 통제를 훨씬 벗어나 있는 기술의 속성을 근본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본과 기술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강요하는 ‘필요’가, 실은 ‘결핍’을 부추기는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기술에 의존할수록 우리는 왜 점점 불구가 되어가는지, 기술이 풍요로워질수록 왜 대다수 사람들이 점점 더 궁핍해져 가는지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이후에야 ‘올바른 생각과 의지’가 세계를 변화시킬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기술 중독 사회’를 넘어서는 길은, 기술 세계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 혹은 그 ‘밖’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