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우리도 ‘메멘토’ 주인공과 큰 차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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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이 끊겼다.’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술자리에서 했던 말을 반복하거나, 10분 전에 저지른 주정을 기억하지 못한다. 알코올이 뇌의 해마 부위를 잠시 마비시키면 ‘선행성 기억상실증’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10분마다 기억을 잃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메멘토(2000년)>는 남의 얘기만은 아니다.

<메멘토>는 뇌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환자 중 한 명인 헨리 구스타프 몰래슨(1926~2008)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공장 노동자 헨리는 스물일곱 살이던 1953년 측두엽 절제수술을 받았다. 심한 간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뇌 절제술은 당시 새로운 정신질환 치료법으로 여겨졌다.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뇌의 일부를 자르면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헨리는 더 이상 새 기억을 만들지 못하는 부작용을 겪었다. 그의 기억력은 30초였다. 방금 나눈 대화나 조금 전 만난 사람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순간’만 살았다. 헨리의 뇌 절제술을 집도한 윌리엄 비처 스코빌의 외손자 루크 디트리치는 외할아버지가 자행한 냉혹한 실험과 관련한 비극에 대해 집필해 2018년 <환자 H.M.>을 펴냈다.

인간은 모두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 셸비(가이 피어스)처럼 기억과 씨름한다. 뇌의 기억용량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기억했다가 금방 잊어먹고 또 잊어먹는다. 메모를 통해 간신히 잊어있던 일을 상기해낸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메모장은 필요 없을 것이다.

레너드는 10분이 멀다 하고 낯선 호텔방에서 소스라치며 깨어나는 일을 반복한다.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하지 못해, 기억이 지워진 새로운 인생을 10분마다 다시 시작한다. 조금 전 자신이 저지른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레너드를 비웃는다. “너는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몰라(You don’t know who you are).”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기 위해 레너드를 기록한다. 자신이 갔던 장소나 자신이 만났던 사람에 대한 판단을 메모에 적는다.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기록하거나,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기기도 한다. 10분 뒤 낯선 호텔방에서 다시 깨면 사진과 문신, 메모를 보면서 끔찍한 사건의 진실을 되짚어야 한다.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하고 누가 적인지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가야 한다.

레너드는 선택적으로 기억한다. 10분이 지나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0분 동안 겪는 모든 일에서 원하는 것만 기록한다. 고통스럽고 불편한 기억은 남기지 않으려고 한다. 레너드는 10분이 지나면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자신이 써둔 메모만 남을 거라는 것을 안다. 일부러 거짓된 내용을 메모로 남겨둔다. 10분이 지나 기억이 지워진 자신을 위해서다. 기억을 조작한 것이다. 레너드는 조작한 기억을 동력으로 미래를 애써 살아간다.

<메멘토>는 제74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과 편집상 후보에 올랐다. 2000년 베네치아 영화제에 출품됐고 이듬해 정식으로 극장 개봉됐다. 개봉 당시에는 난해한 영화였으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특유의 복잡하고 난해한 영화가 연달아 개봉하면서, 놀란 감독의 영화 가운데서 이해하기 쉬운 편에 속하게 됐다.

<메멘토>가 난해한 이유는 영화 전개가 역순이기 때문이다. 컬러 장면은 시간을 거꾸로 흐르지만 흑백의 과거는 시간 순행이다. 이런 탓에 극의 전개가 과거 기억과 맞물려 흐름이 복잡하게 엉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장면을 놓치면 내용을 따라가기 어렵다.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평이 나오는 대목이다. 흑백 화면을 따로 모아 붙이고 컬러 화면은 순서를 거꾸로 돌려 흑백 장면에 이어 붙이면 시간 순행이 된다.

놀랍게도 레너드의 삶은 낯설지 않다. 우리는 싫은 기억을 외면하고 내가 알고 싶은 기억만 선택적으로 남겨두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남긴 숱한 기억의 메모 속에서 그만 길을 잃어버린다. 어지러운 기억 더미 속에 적어도 방향을 잃지 않으려면 진위를 가려내고자 애써야 한다. 안위만 따져 거짓 속에서만 살아도 끝내 진실을 목도하게 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만 남기려 해도, 끊긴 필름 속에서 왜곡된 진실들은 어렴풋이 떠오른다. 기억을 아무리 편집하고 조작해도 진짜 증거는 선명하다.

<환자 H.M.>의 저자 루크는 말한다. “기억이 우릴 만들어도, 우리가 기억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최근에야 밝혀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 이해에 어떻게 도달했는지가 바로 이 책에서 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에는 영웅과 악당들, 비극과 로맨스, 폭력과 친절함이 있다. 이 책은 과학 이야기이자 인간과 모든 것의 본성을 말하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