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 차림으로 팩 소주에 빨대를 꽂고 홀짝이면서 거리를 걸어가는 여성 정은(유다인). 캐리어를 끌고 가다가 팩을 구겨 던진다. 정은의 삶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서울에서 7년간 사무직으로 일하던 그는 한순간에 바닷가의 하청업체로 파견된다. 알코올에 의존하는 정은의 모습은 오랫동안 몸 바친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 직원의 심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은이 발령 난 하청업체 업무는 송전탑 유지·보수‧관리다. 송전탑은 고압 전선을 걸기 위해 세우는 철탑이다. 우리나라는 765kV 고압 송전탑의 경우 최저 지상고가 28m로 철탑의 평균 높이는 100m에 달한다. 송전전기원들은 20㎏가량 되는 장비를 착용한 채 1개당 8㎏인 애자까지 메고 탑을 오른다. 이들의 삶에는 추락사와 감전사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회사에서 행정업무를 보던 정은을 하청업체에 보낸 건 사실상 해고 통보다. 현장 작업 위주인 하청업체에서 정은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탓이다. 회사에서는 1년만 버티면 본사로 복귀시켜주겠다고 하지만, 사측은 정은에게 낮은 인사고과를 준 뒤 ‘합법적으로’ 해고할 계획이다.
하청업체 입장에선 정은은 전혀 달갑지 않은 원청 직원이다. 인건비는 정해져 있고, 정은이 계속 버티면 하청업체 직원 중 한 명을 해고해야 한다. 하청업체 소장(김상규)은 정은에게 “이곳은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시골 마을이다. 젊은 사람들은 아이들 대학 진학을 위한 위장전입 목적이 아니고서야 살지 않는다”며 핀잔을 준다.
정은은 숙소의 유리창에 빨간 펜으로 1부터 365까지 차례로 숫자를 적는다. 하루씩 지우며 언젠가는 본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실낱같은 희망을 품는다. 이를 위해 악바리처럼 버틴다. 송전탑 수리법을 익히기 위해 늦은 저녁까지 텅 빈 작업장에서 설명서를 보며 공구와 씨름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직원들을 따라 현장에 나선다. 하지만 정작 그는 공포에 휩싸여 송전탑에 오르지도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원청에서는 해고의 근거가 될 근무평가를 위해 평가관을 파견한다. 정은은 평가관 앞에서도 거대한 송전탑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굳어 결국 땅에서 발을 떼지 못한다.
좌절한 정은에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건 동료 직원 충식(오정세)이다. 충식은 하청업체에 뒤늦게 취업해 ‘막내’로 통한다. 그는 정은의 파견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될 처지다. 생계를 위해 낮에는 송전탑에 오르고, 퇴근 후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겨우 이어가는 그는 근무평가 점수가 가장 안 좋은 직원이다. 하청업체 직원들 가운데 정은의 존재가 가장 달갑지 않은 이는 충식이다. 그런 충식이 정은을 돕는 이유는 연대감 때문으로 보인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쫓겨나 송전탑을 올라야 하는 정은의 처지가 목숨을 걸고 하루하루 보내는 자신과 같다고 느껴서일 것이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서 송전탑은 위험하지만 반드시 올라야 하는 대상이다. 자칫 실수하면 감전사하거나 낙사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정은에게 송전탑은 그를 짓누르는 현실의 장애물이다. 송전탑을 올라야만 정은은 살아나갈 수 있다. 원청에서 하청으로 좌천된 정은의 심리적 하강과 공포와 싸우며 탑에 오르는 상승은 절망에 맞서야 하는 아이러니를 나타낸다. 송전탑에 한 발짝 오르기도 버거워하는 정은은 충식의 도움으로 차츰 적응해나간다. 하지만 끝내 빚어진 사고로 정은은 분노한다. 노동자의 생명을 몇 푼의 돈과 맞바꾸려는 자본의 뒤틀린 생리를 더 이상 방관하지 않는다.
영화는 초중반부까지 사회적 문제를 다룬 여타의 영화들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려는 정은의 노력이 신선하지 않아서다. 알게 모르게 차별받는 정은의 분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무수하게 다뤄 온 설정이다. 다만 각 인물이 감정을 쌓아가는 방식이 남다르다. 정은의 노력에 감동한 동료들이 정은에게 힘을 보태는 위기극복 서사가 아니라 끝까지 냉소적 태도를 유지한다.
또 관객보다도 먼저 흥분하는 ‘분노 상업주의’와 결이 다르다. 별다른 대사 없이 상황 묘사와 동작만으로 등장인물의 처지와 고민까지 드러낸다. 영화는 고용 문제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지만, 욕설이나 감정 과잉으로 치닫지 않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면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에게 직업이란 무엇인가?”
좌천되기 전 정은은 회사에서 자신을 ‘뛰어난 부품’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수시로 코피를 쏟으며 야근을 했다. 여자 동기들에게 정은은 ‘전설이자 희망’이었다. 우수직원이던 그는 어느 날 회사에서 쫓아내야 하는 직원으로 전락했다. 일감도 주지 않은 채 벽을 마주하며 일을 시키던 회사는 정은을 하청업체로 보내버린다. 정은의 선례는 직장에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다. 권고사직을 거부하던 그는 영정사진으로 등장한다. 정은이 떠난 자리는 정은의 여자 동기가 이어받는다. 직장 내 업무 배제, 하청업체 파견은 곧 회사를 그만두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충식은 정은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일하다 잘못되면 두 번 죽어요. 한 번은 낙하, 또 한 번은 전기구이. 근데 그런 거 하나도 안 무서워요. 우리가 무서운 것은, 해고예요.” 충식의 직업에는 딸들의 생계가 걸려 있다. 정은은 갑작스러운 해고 이후 결국 생을 마감한 친한 언니의 죽음을 회상하며 답한다. “해고든 사망이든 그게 뭐가 다르냐.” ‘해고’와 ‘죽음’은 가엾은 노동자의 삶 한가운데서 무겁게 짓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