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익숙한 누아르 ‘낙원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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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조직 간 암투, 배신, 복수. 박훈정 감독의 신작 <낙원의 밤>의 장르는 누아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누아르의 클리셰가 반복된다. 영화는 범죄조직의 이인자 태구(엄태구)가 다른 조직에 납치된 조직원들을 구하러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친절하게도 상대편 조직의 수장 황 사장(차순배)은 태구와 태구 조직에 대해 설명하듯 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

태구의 조직은 크진 않지만, 태구는 최대 규모 조직 북성파에서 탐내는 에이스다. 북성파 도 회장(손병호)은 태구의 배포와 실력을 높이 평가해 그를 자신의 조직으로 데려오려고 한다. 태구가 속한 조직 수장 양 사장(박호산)은 위세가 약한 인물이다. 조직원을 구해낸 태구는 병원으로 향한다. 병원에서는 태구의 이복형제인 누나(장영남), 조카가 등장한다. 태구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누나를 걱정하는데, 의문의 교통사고로 누나와 조카는 세상을 떠난다.

태구는 사고의 배후가 북성파인 것으로 직감하고 북성파 도 회장을 습격한다. 그리고 양 사장의 도움을 받아 제주도로 숨은 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밀항할 계획이다. 남은 양 사장 패거리는 북성파를 와해시기 위해 나서지만, 되려 북성파의 이인자 마 이사(차승원)에게 당한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양 사장은 검찰 간부 박 과장(이문식)에 도움을 청한다. 마 이사는 박 과장의 제안으로 양 사장과 함께 태구를 제거하고 복수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제주도로 떠난 태구는 무기상 쿠토(이기영)와 그의 조카 재연(전여빈)에게 몸을 의탁한다. 가족을 잃고 복수까지 마친 그는 삶에 희망이 없다. 폭력조직과 거래하는 쿠토 때문에 과거에 재연은 가족을 잃었다. 또 불치병을 앓아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탓에 어떤 상황에서도 초연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며 두려움 없이 행동한다. 쿠토는 불법 무기 거래를 늘려 큰돈을 모아 미국에서 재연을 수술할 계획이다. 재연은 조직의 의뢰를 받고 태구를 숨겨주는 게 불만이다. 영화는 태구와 재연, 마 이사와 양 사장의 상황을 번갈아 가면서 보여준다.

설정은 익숙하다. 각자의 이해관계는 복잡하지 않다. 이야기가 전개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있을 정도다. 태구와 재연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삶의 벼랑 끝에 섰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서로 상처를 알고 교감해가는 방식도 뻔하다. 티격태격하다가 목숨의 위협을 느낄 사건을 겪고 도망자 신세가 된 후 둘의 감정이 급격히 바뀌는 것도 익숙히 봐온 전개다.

문제는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영화의 전체 맥락에 녹아들지 못한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행동이나 상황으로 모든 동기를 설명하는데, 썩 매끄럽지 않다. 이야기를 쌓아가면서 감정을 고양시켜야 관객에게 영화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이 스며든다. <낙원의 밤>에서는 관객이 어떤 장면인지 파악할 겨를도 주지 않고 배우들이 갑자기 슬픔, 분노, 혼란, 실망 등의 감정을 연기한다. 가장 큰 문제는 태구와 재연 외에는 인물들이 평면적이라는 점이다.

<낙원의 밤>에 나오는 조연들은 호연을 펼치는 연기자들이다. 배우 차승원은 일을 귀찮아하면서도 냉혹하고 거침없이 처리하는 마 이사를 연기한다. 적당히 무겁고 거칠면서도 의외의 유머를 품은 대사로 영화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배우 차순배, 장영남, 손병호, 이문식, 이기영은 특별출연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분량이 적다. 강렬한 연기를 보여주지만, 맡은 역할의 한계로 인해 태구와 재연을 설명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느껴진다.

<낙원의 밤>은 누아르의 팬이라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영화다. 그러나 <신세계(2013년)>의 퀄리티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두 영화 모두 주인공 2명의 교감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신세계>는 여운이 긴 반면에 <낙원의 밤>은 분위기만 잔뜩 자아낸다. <신세계>는 이야기 전개에 방점을 두고 캐릭터를 만들어냈지만, <낙원의 밤>은 인물의 감정과 분위기가 빚어내는 서정성에만 무게를 실은 탓이다. 박훈정 감독 스타일을 살릴 수 있는 무게의 중심이 될 만한 연기자들을 각본과 연출이 망쳤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