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은 끝나지 않았다]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으로 돌아가자

얼마 전 가족여행으로 고성 통일전망대를 갔다.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최북단이다. 여섯시간 동안 차를 몰고 도착한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땅의 모습은 금강산을 열여섯 번 방문한 나에게도 여전히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휴전선 너머로 철로와 도로가 연결되어 있지만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졌다. 더위는 잠시 식혔지만 마음은 여전히 답답하였다.

올해는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된지 30년이 되는 해다.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는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1년 12월 13일, 남북고위급 회담 남측 수석대표 정원식 국무총리와 북측 수석대표 연형묵 정무원 총리 서명으로 채택되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전문과 25개 조항의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25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본문은 남북화해, 남북불가침, 남북교류·협력 등 3개 범주로 구성되어 있다.

▲1992년 2월 17일, 노태우 대통령이 정부 각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르면 남북간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이 서로의 실체를 인정한 최초의 문서라는데 의미가 있다. 합의서 서명 주체인 정원식 국무총리가 ‘대한민국’의 총리이고 연형묵 정무원 총리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정무원 총리라는 것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남북 사이 최초의 합의문서는 박정희 정권시절인 1972년 채택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 통일의 3대원칙을 합의한 이 문서의 서명은 다음과 같다.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 김영주
1972년 7월 4일

다시 말해 남과 북을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국가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드러내면서 실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남북기본합의서는 남과 북이 서로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고 존중하기 시작한 최초의 문서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 통일방안은 김영삼 정부 때 완성된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이다 하지만 이 통일방안의 기초가 된 것은 노태우 정부 때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핵심은 과도적 통일체제로 ‘남북연합(Korea Commonwealth)’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법적, 제도적 통일 이전에 남북연합을 구성해 남북 간 개방과 교류협력을 실현하고 민족사회의 동질화와 통합의 기반을 다져나가자는 것이다. 과도적 통일체제를 설정했다는 것은 통일을 한 번에 이루지 않고 단계적으로 이루어 나가겠다는 것이며 법적, 제도적 통일. 즉 결과적 통일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통일을 이루어 나가겠다는 의미다.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호 실체 인정과 상호 존중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국가로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 김정은 정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북도 대한민국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과정으로서 통일을 위해서는 상호 교류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서로를 알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북합의서 정신은 김대중 정부 들어 남북이 합의한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진행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으로 실현되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은 서로 알고 이해하고 협력하는 연습공간이었다.

반도의 동쪽에서 이루어진 금강산 관광은 단순 관광이 아니라 관광이라는 매개를 통해 우리 국민이 직접 북을 방문하여 북을 이해하는 사업이었다. 또한 북의 입장에서도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라 남측 관광객을 맞으며 관광사업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대한민국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장이기도 하였다. 금강산 관광 10년 동안 남과 북은 천하절경인 금강산을 매개로 이해와 협력이 깊어졌다.

반도의 서쪽에서 이루어진 개성공단 역시 단순한 경제협력 사업이 아니라 민족경제공동체를 이루어가는 현장이었다. 남과 북은 유무상통(有無相通)의 정신에 따라 남은 자본과 기술력, 북은 토지와 노동력을 제공하여 세상 어느 곳에도 없는 개성공단을 만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통일되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개성과 평양, 금강산, 백두산을 가고 싶다고 한다. 대학생은 남북 학생들이 함께 캠핑을 하고 싶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기차를 타고 유럽여행을 가고 싶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사실 통일이 되면 가능한 일이 아니라 통일전에도 가능한 일이며 통일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북한 관광도, 개성공단도, 남북대학생 공동캠프도, 기차를 타고 유럽으로 가는 일도 어쩌면 매우 쉬운 일이다.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으로 돌아가면 된다. 상호 실체의 인정과 상호존중의 정신으로 말이다.

2019년 4.27판문점 선언과 9.19평양공동선언으로 남북관계의 획기적 변화를 기대했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 중단된 금강산 관광도 박근혜 정부 시절 철수한 개성공단도 여전히 다시 열지 못하고 있다.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30년이 되는 올해 남북이 상호 존중의 정신으로 돌아가 남북관계의 진전을 이루어내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김두현 수성구의회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