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768년, 임산부의 죽음과 암행어사 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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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라면 가을걷이로 풍요로운 가을을 맞고 있을 때이지만, 1768년 음력 9월의 인동仁同(현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지역)은 흉흉하기 이를 데 없는 가을을 보내고 있었다. 9월 내내 옥사獄事(살인 등에 준하는 대형 형사 사건)이 있었고, 전임 선산부사를 지냈던 김치공金致恭이 암행어사가 되어 인동에 나타났을 정도이니, 국가적 관심사를 가진 사건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전말은 큰 사건인데, 사실 이 사건은 사소한 일에서 발생했다.

전임 인동부사였던 심명희沈明希는 기녀를 첩으로 들였는데, 그녀가 인동의 향사당鄕射堂 앞을 지나면서 가마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친 일이 있었다. 지금 기준에서야 청와대 앞이라도 차에서 내리는 일은 없으니, 어딘들 가마에서 내릴 일이 있을까 싶지만, 조선시대에 범마犯馬는 예를 어기는 일로 치부되어 엄하게 처벌했다. 예를 표해야 할 대상이나 장소에서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야 했고, 특히 신분의 차이가 분명할 때에도 반드시 말에서 내려야 했다. 이는 가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를 어기면 ‘예를 지키지 않은 행위’로 처벌받았다. 향사당은 지역 유림들의 자치 기구 청사였으니, 때에 따라 내려야 할 사람도 있고, 내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당시 인동의 향청을 맡고 있었던 좌수座首 문성목文聖穆은 이를 무례로 판단했고, 심명희의 첩은 길을 막는 좌수와 말다툼 끝에 그를 모욕했다.

사실 문성목이 전임 인동부사의 첩이니 그냥 모른 채 하고 지나쳤거나, 문성목이 가로막았을 때 심명희의 첩이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었으면 가볍게 지나갈 일이었다. 그러나 문성목으로서는 아무리 전임 인동부사의 첩이라고 해도 천인賤人이 향청의 수장인 좌수를 모욕한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당연히 관아에 고발되었고, 인동부사 이세탁李世倬 역시 그냥 덮어 둘 수 없는 일이었다. 향청을 대표하는 좌수와 지방관은 대체로 협력관계였으니, 인동부사 입장에서도 좌수 문성목의 말을 물리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관아에 끌려온 심명희의 첩 역시 조금도 자세를 굽히지 않았고, 대동한 오빠와 함께 대들기까지 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인동부사 역시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그는 지역 풍속에 관한 문제이니 향회鄕會에서 결정하되, 자신도 거기에 참여하겠다고 통보했다. 당연히 좌수가 수장인 향회에서는 모두가 문성목의 편이었다. 회의에서는 심명희의 첩에 대한 거친 말이 오갔고, 심지어 모인 향원鄕員 50여 명은 무례한 남매를 죽여야 한다고 성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국법에 비추어 봐도 죽일 죄는 아니어서, 관아에서는 남매에게 각각 장丈 20대를 쳐서 내보냈다. 지역 수령이 가할 수 있는 직단권(상위 기관인 감영의 허가 없이 처벌할 수 있는 범위)을 넘어선 것일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향회에 모인 향원들은 남매를 그냥 보낼 수 없다면서 향청으로 끌고 가 향원 1사람당 곤장 5대씩을 더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곤장은 중벌이었다. 회초리로 때리는 태형笞刑까지만 군현의 지방관들이 처결할 수 있고, 장형 이상은 상위 기관인 감영의 지휘를 받아야 했던 이유이다. 이는 행여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처벌에 대해서는 한 단계 더 심의 과정을 거치게 했던 것이다. 여기에 따르면 인동부의 장20대도 문제였다. 그러나 여기에 250대가 더해졌으니, 이 정도의 장에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두 남매는 결국 곤장을 맞다가 사망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당시 죽은 전 인동부사의 첩은 임신 중이었다. 국법에 따르면 임산부에게는 해산할 때까지 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 어떠한 형도 최소한 아이는 낳은 후에 집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를 어기는 바람에 결국 전임 인동부사 심명희는 첩과 처남을 잃은 데다, 뱃속의 자식까지 잃었다.

암행어사는 아마 심명희의 고변에 의해 파견되었을 것이다. 왕의 입장에서도 군현의 수령이 직단해서 2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한 명은 임신한 여성이었으니 문제가 심각했다. 전임 선산부사 김치공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출두까지 한 이유였다. 암행어사는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인동부사를 파직하고 인동 관아 사람들 50여 명 전체를 또다시 장형으로 다스렸다. 좌수를 비롯한 나이 든 향임들은 초죽음에 이르렀고, 관아는 곤장 맞는 소리와 비명, 그리고 곡소리로 떠나갈 지경이었다. 그런데 사건이 꼬이려 한 탓인지, 암행어사의 곤장도 문제가 되었다. 장을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명의 향인이 사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좌수 문성목과 향인 두 명이 또 다시 장독을 이기지 못해 사망했다. 암행어사의 처벌로 5명이 더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야말로 자존심의 싸움이었을 것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심명희의 첩이 예를 어긴 것도 사실이었을 터였고, 전 인동부사를 남편으로 둔 심명희의 첩을 인정하지 않은 인동향청도 문제는 있었다. 하지만 7명의 생명을 앗아간 실질적 이유는 그에 대한 처결 과정이었다. 인동부사가 직단권 내에서 처벌했거나, 최소한 국법에 따라 임신한 사람의 처벌을 유예했으면 어땠을까? 250대의 장형에 버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칼로 사람을 찔러 살아날 사람이 없다는 사실만큼이나 확실하지만, 향청은 자존심을 위해 처벌 수위를 넘겨 버렸다. 암행어사도 문제였다. 그의 보고를 통해 왕은 직단권을 어긴 인동부사 이세탁을 종성에 유배 보내고, 일을 주도했던 문성목에게만 곤장 100대와 원지 유배를 명했다. 암행어사가 직단하지 않았다면 이미 죽은 문성목은 위험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머지 4명의 억울한 죽음은 없었을 터였다. 억울함을 갚으려 했던 처결 과정 또한 수위를 넘겼던 것이다.

법은 그 특성상 적절한 처벌의 통해 억울한 피해를 없애고 이후 발생할지도 모르는 범죄를 예방하려 한다. 문제는 적절한 처벌의 범위인데, 이를 위해 법은 다양한 규제와 숙고의 과정을 명문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는 규제와 숙고의 과정을 명시한 법이 없는 게 아니라, 법을 집행하는 이들이 이를 어기고 자신의 주관적 공평함만으로 일을 처리할 때 발생하기 마련이다. 조선이 비록 현재 대한민국만큼은 아니지만, 동시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매우 합리적인 법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권은 합리적인 법제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보장된다는 사실은 그들 스스로도 잘 몰랐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주소 역시 법이 없어 문제가 아니라, 집행하는 사람들의 권한 남용과 숙고과정에 대한 무시가 더 문제이듯 말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