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시적 표현에 대한 두 가지 시선, 은유인가 역모인가?

16:25

한창 가을걷이로 바쁜 1800년 음력 9월 28일, 류의목柳懿睦은 “막곡의 원장 김광제와 유곡의 권사호가 잡혀갔다”는 소식이 하회마을로 전해졌다는 기록을 남겼다. 전후 사정을 알아보니, 사안은 심각했다. 역모 혐의였기 때문이다. 혐의만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그래서 입에도 올리기 거북한 혐의가 바로 역모가 아니었던가! 다행히 권사호의 혐의는 그 이전 해에 과거 시험에서 쓴 답안 때문에 발생했는데, 이미 한 번 무혐의 판결을 받았고 혐의만으로 파직까지 당했던 지라 다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김광제였다. 김광제는 얼마 전 향교에서 시를 쓴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보고 서인인 이종윤이 고변을 했던 것이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흰 무지개가 붉은 해를 꿰뚫었으니,
의심과 시끄러움을 새로 더했네.
동방에 깊은 근심이 있으니 먼 후일의 일을 어찌 말하리오.
파도를 일으키는 군주가 물결을 더하니
제향祭享을 행여 빠트림이 없기를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게 무슨 역모를 꾸미는 내용일까 싶기는 하다. 그러나 시詩라는 장르의 특성상 그 의미는 늘 중의적인데, 문제는 이를 해석하는 당시의 일반적 인식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읽다보면, 기상이나 기후 관련 기록 가운데 “햇무리가 끼었다”거나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거나, “태백성이 낮에 관측되었다”는 기록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대왕의 즉위년에는 거의 매일 햇무리가 끼었고, 어떤 날은 무지개가 해를 꿰뚫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해 정월 초하루 출근하던 선비 김종은 출근길에 태백성이 관측되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불길한 예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의 기상청에 해당하는 관상감에서는 빼지 않고 올려야 하는 보고가 바로 햇무리나 태백성, 태양과 관련된 이상 현상들이었다. 이는 왕과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현대에 비해 과학적 사유가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우주의 운행과 자연 현상을 사람의 일과 관련지어 해석하곤 했다. 이 때문에 일상적이지 않은 기상 상황이나 하늘의 특이한 현상은 하늘이 사람들에게 내리는 경고나 징조로 해석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해가 왕을 상징한다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햇무리에 대한 기록이 많다는 것은 아직 왕이 무능하거나, 왕을 가리는 것-간신들이나 외척 세력 같은-이 많다는 메타포였다. 무언가 해를 꿰뚫고 지나가는 형상은 좀 더 심각한 의미로 해석되었다. 왕이 위해를 당할 징조이거나, 혹은 왕이 자리를 보존하지 못할 가능성을 의미했다. 태백성은 오행으로 보면 쇠(金)와 관련이 있는 별인지라, 흔히 금성金星이라고 불렀다. 쇠는 무기로 치환되므로, 태백성이 낮에 관측되면 전쟁이나 반란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조선시대 이러한 인식은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인식에 가까웠다. 물론 비교적 과학적 사고를 했던 지식인들에 의해 이러한 사고가 가진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지적하는 사람 역시 그러한 인식을 모르지는 않았다. 김광제의 시를 보자. 그는 첫 구절을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다”로 시작하니, 이는 당연히 왕의 안위에 대한 경고이거나 혹은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의심과 시끄러움”은 혼란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특히 그 다음 구절인 “동방에 깊은 근심”에서 ‘동방’은 당연히 ‘조선’으로 해석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서인인 이종윤의 고변은 일리가 있었다.

김광제의 시는 왕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서인이나 혹은 왕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여지가 컸다. 김광제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심문이 시작되자 그는 일단 그러한 시를 지은 적이 없다고 잡아떼었다. 그러나 함께 붙잡혀간 김세민을 심문하던 자리에서 이러한 시를 지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난감했다. 이제 문구에 대한 해석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김광제는 “흰 무지개가 붉은 해를 뚫는다”는 말은 “흰 무지개가 향교 강당으로 들어 온다”는 말이었고 ‘동방’은 ‘우리 마을’을 의미하는 것인데, 누군가 이 말을 잘못 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의 의미야 원래 중의적이니 시를 쓴 사람이 그렇다는데 어찌할까 싶기는 했을 터였다.

그러나 심문하던 관원이 의심을 풀지 않고 고문용 신장訊杖이라도 휘두르면 김광제 역시 배겨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역모 혐의는 그래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관원은 정말 그러한 내용으로 기술되었는지 원본의 제출을 요구했다. 그런데 김광제는 여기에서 또 한 번의 거짓말이 들통났다. 보관하려 했던 시가 아닌지라 버렸다고 했는데, 그의 아들 주머니에서 원본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의심에 의심을 더해 시의 내용을 해석하면, 김광제의 목숨은 더 이상 산목숨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말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심문하던 관원은 “말한 의미대로 시를 쓴 것이라면 무에 그리 죄 될 게 있는가?”라면서 김광제를 방면하고, 오히려 이중윤을 무고죄로 체포하려 했던 것이다.

김광제가 풀려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던 기록자 류의목마저 그가 왜 옛날에 쓴 시를 그 아들로 하여금 가지고 있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을 가졌다. 그러나 당시 심문했던 관원의 눈은 이종윤의 입장에서 김광제의 시를 본 것이 아니라, 김광제가 진술한 그대로 시의 의미를 받아들였다. 심문자에 대한 기록이 없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는 서인은 아닐 것으로 짐작하는 이유이다. 그래야 흰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것이 ‘향교 강당에 들어오는 햇살을 그린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말[言]은 늘 ‘말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 의미는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이유이다. 하긴 지금 우리 정치현장에서도 글자 한 자 틀리지 않은 말이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극단적으로 달리 해석되는 경우가 난무하는 것을 보면, 이 당시 심문했던 관원만을 탓할 일은 아닌 듯하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