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인간이 만들어가는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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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나타나 사람을 무자비하게 불태워 죽인다. 인간은 대항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 앞에서 무력하다. 괴물들이 도시를 휘젓고 다녀도, 그에 맞설 수조차 없다. 인류는 공포에 휩싸인다.

10년 전부터 꾸준히 괴물들의 살육을 신의 경고라고 설파한 종교단체가 있다. 새진리회의 의장 정진수(유아인)는 죄를 지어도 제대로 벌주지 않는 세상에 신이 강림해 몸소 정의를 보여주기 시작했다고 설파한다. 그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불가사의한 존재가 나타나 지옥행을 선고한다며 이것을 ‘고지’, 괴물들이 사람을 찢고 불태우는 학살을 ‘시연’으로 칭한다. 고지와 시연을 눈앞에서 목격한 인류는 새진리회의 교리를 법도로 여기고 따른다. 새진리회의 광신도단체 ‘화살촉’은 신의 뜻을 직접 실현하겠다며 테러를 벌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은 지옥의 사자들이 세상에 나타나 인간에게 지옥행 선고를 하는 초자연적 현상과 세상의 혼란을 틈타 부흥한 종교단체 새진리회, 고지와 시연의 실체를 밝히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2019년부터 2020년까지 네이버 웹툰에 연재된 동명의 만화가 원작이다. 웹툰 원작자 최규석 작가와 연상호 감독이 공동 각본을 쓰고 연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흥미로운 점은 천사와 사자에 서사가 없다는 것이다. 초월적 존재가 인간을 죽이는데 이유는 없다. 유희나 여흥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초자연적인 존재일 뿐이다. 드라마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건 초월적 존재를 향한 인간의 시선과 행동이다. 20년 전 고지를 받은 정진수는 죄가 될 만한 일을 피하고 정의로운 일을 실천하며 살아왔다.

이미 받은 ‘고지’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전부 자신과 같은 공포를 느끼라는 이유로 새진리회를 만들어 교리를 전파해왔다. 이 때문에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새진리회는 신을 이용해 무분별한 살육을 단죄로 정당화한다. 화살촉은 인간 세상의 법과 질서, 도덕을 외면하고 신의 뜻이라는 명분의 테러를 일삼는다. <지옥>은 신의 존재 여부나 정당성보다는 신의 뜻을 빙자한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주목한다.

드라마는 신의 의도를 특정한 의미로 해석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어떤 지옥으로 바뀌는지 보여준다. 인류는 초월적 존재가 인간을 벌하는 것에 아무도 의심을 품지 않고 맹목적 믿음을 행동에 옮긴다. 화살촉은 고지를 받은 이들을 찾아가 가족의 신상을 털고, 죄를 실토하라며 린치를 가한다. 이 과정에서 광기 어린 어조로 타인의 죽음을 조롱한다. 신의 뜻을 부정하는 것으로 지목된 이들에게는 고지와 상관없이 폭력을 휘두른다. 그러고는 자신들은 신이 날린 화살이라고 합리화한다.

새진리회는 지옥행 고지와 시연이 잇달아 일어나며 세상이 혼란해진 것을 이용해 교세를 확장하고 공권력도 건드리지 못하는 초법적 단체가 된다. 신이 아무런 의도 없이 학살하는 것을 알고도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진실을 숨기고 고지 받은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한다. 드라마에서 지옥행보다 무서운 것은 죄를 지었다는 낙인이다. 고지를 받게 되면 영문도 모르고 죄인 취급을 당해야 하고 죄인의 유족은 평생 죄인의 가족이라는 멍에를 짊어져야 한다.

<지옥>의 인간군상에는 현실의 면면이 반영돼 있다. 우리는 죄를 지은 이가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가. 끔찍한 살인을 벌인 흉악범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지 않는다. 범행 당시 술을 마셔서 감형을 받는다. 촉법소년이라는 이유로 형사처벌 대상에서 벗어난다. 과거 학살을 지시한 권력자는 자리에서 물러난 뒤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떵떵거리며 산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형사사법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추이’에 따르면, 국민 중 절반 이상이 경찰, 검찰, 법원 등 사법기관을 믿지 않는다.

지난해 아동 성폭행 혐의로 12년을 복역한 조두순(68)이 만기 출소하자 그의 집 앞은 그를 직접 응징해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사람들로 붐볐다. “공포가 인간을 참회하게 만든다”는 정진수의 말이, 인간이 만든 법과 질서보다 가슴에 더 와닿는다. 죄를 지어도 제대로 벌 받지 않는 세상, 나쁜 놈들 앞에 초월적 존재가 나타난다면 어떨까? 드라마와 다른 세상이 펼쳐질까? <지옥>은 올해 넷플릭스 드라마 가운데 좋은 만듦새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웹툰 원작에 비해서는 다소 힘이 빠진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