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규 칼럼] 말라이 무띤! 떠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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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마세요, 우리를 두고 떠나지 마세요. 말라이 무띤!”

2003년 10월 23일. 동티모르 아이들이 철수하는 상록수부대 장병들에게 울면서 매달리고 있다. 부대 주둔지 인근 마을 사람들도 다 나와서 눈물을 짓고 있다. 헬기장으로 가는 장병들은 충혈된 눈으로 이따금 뒤돌아보며 말없이 손만 흔든다. 공항으로 가는 UN헬기에 몸을 맡기고도 주민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밖을 보고 있다. 귀국하는 전세기 안에서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이는 필자가 기자들과 함께 현장에서 본 모습이다. 가끔 그때 영상을 본다. 현지 주민들이 눈물로 환송하자 장병들도 몰래 눈물을 훔친다. 아이들이 “말라이 무띤(다국적군의 왕)”을 외치는데 장병들은 목이 매 그런지 묵묵부답이다. 장병들이 말이 없는 이유는 “복귀명령이 아니면 더 봉사하겠다”라는 의미다. 좀 더 도와주지 못한, 좀 더 같이 있지 못한 아쉬움에서 침묵하는 것이다. 말문이 터지면 담지 못할 것 같아 참는 것 같다. 이런 모습은 동티모르 파병 장병들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다. 소말리아, 앙골라, 서부사하라,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아이티, 필리핀 등 파병 철수부대에서 흔한 모습이다. 현재 ‘최고 중 최고’로 극찬 받는 남수단, 레바논, 아랍에미리트, 아덴만에 파병 중인 장병들도 좀 더 돕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귀국할 것이다.

▲동티모르 오쿠시(Oecusse) 주민들과 함께. 필자는 당시 합참 공보장교로서 상록수부대가 6개월 단위로 교대할 때 2번이나 동티모르 현지에 다녀왔다. [사진=전병규]

장병들은 어려움에 부닥친 현지 주민들과 나눌수록 더 나누고 싶은 마음을 가진다. 물불 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해 돕는다. 각종 물품을 진심으로 나누며 생색내지 않는다. 주민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을 알고 있다. 나눔에는 말이 필요 없다. 뜨거운 가슴만 있을 뿐임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귀국 길에서는 말이 없는 장병들이지만, 주민들을 도울 때는 말을 참 많이 한다. 찾아가서 먼저 말을 건넨다. 파병 지역은 처참하다. 내전이 발발했거나 끔찍한 재난이 발생한 곳이다. 장병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들을 가족처럼 여기고 희망을 주기 위해 먼저 다가선다.

동티모르는 500년 동안 포르투갈 식민지로 있다가 1975년 인도네시아에 병합됐다. 이후 끈질긴 저항과 유엔의 도움으로 2002년 독립한 신생국가이다. 당시 걸음마를 떼고 있는 동티모르가 설 수 있도록 장병들은 자기 일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기꺼이 임무를 수행했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일어선 우리이기에 더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한다. 동티모르는 4년에 걸쳐 헌신한 상록수부대에 파병국가 중 ‘최고’라는 ‘말라이 무띤(다국적군의 왕)’으로 마음을 전했다.

험지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의 활력소는 ‘가족과 국민의 성원’이다. 성원에 힘입어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기꺼이 헌신한다. 받은 것을 나누고 또 받고 나누는 선순환의 흐름이다. 이들의 헌신과 봉사에는 우리 국민의 성원이 함께 한 것이다.

2003년 상록수부대가 동티모르에서 철수한 후에도 국제교류협력단과 NGO 등은 계속 동티모르를 돕고 있다. 2020년 마스크 20만 장을 전달했고, 수도 딜리 시내에 페트병으로 만든 세면대를 30곳에 설치했다. 환경과 위생을 위한 세면대 설치는 동티모르가 세계 최초 ‘플라스틱 제로’ 국가를 선언한 계기로 이어졌다.

2021년이 저물고 있다. 코로나19로 지구촌이 암울하다. 어둡다. 이 어둠은 우리를 고립시키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한다. 노리나 허츠는 저서「고립의 시대」에서 현대인들의 ‘외로움’과 ‘고립감’은 어쩌면 코로나19보다 더 심각하다고 주장한다. 코로나19를 극복하듯이 우리를 고립시키는 어둠도 몰아내야 한다. 이를 위해 빛을 밝혀야 한다. 나눔의 따사로운 햇볕이다. 서로 나누고 함께할 때 우리를 둘러싼 어둠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마치 빛을 비추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요즈음 국민들의 관심은 온통 대선(大選)에 쏠려 있다. 나누며 함께하는 대선(大善)에도 관심을 쏟아야 한다. 나눔의 햇볕을 이웃에 비추자. 이것은 이웃이 처한 상황에 공감하고 소통하는 진실한 마음이다. 파병 장병들이 나눌수록 더 나누고 싶어지는 그 마음이다. 새해가 다가온다. 사회적 거리는 멀리하지만 마음은 더 가까이해야 한다. 이웃에게 먼저 따뜻한 마음을 보내자. 좀 더 나누지 못해 아쉬워하는 장병들처럼.

전병규 kyu9664@naver.com
육군에서 33년 복무하고 2021년 예편했다. 소말리아, 이라크에서도 근무했다. 전역 직전에는 대구, 경북을 지키는 강철사단의 부사단장을 역임했다. 대구과학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