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남는 건 슈트 빼입은 건달의 건들거림 뿐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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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은 시대착오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다. 윤영빈 감독은 “강릉은 개발 이후 수혜를 받은 적이 없는 도시다. 올림픽 시작하면서 호텔, KTX 등이 들어오고 개발이 시작됐다”며 “개발의 기대감과 걱정이 섞이고 개인적으로는 개발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서 대본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윤 감독의 속내는 영화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강릉>의 배경은 평창올림픽이 열리기 전 2017년이다. 강릉에 지어지는 리조트 소유권을 놓고 강릉 안팎 조직폭력배들이 눈독을 들인다. 이민석(장혁)은 리조트의 2대 주주다. 그는 지분을 소유한 남 회장(박정학)을 제거하고 그의 지분을 갖게 됐다. 민석은 10년 전이던 2007년 전라도 군산 앞바다에 표류하던 배에서 발견됐다. 손에는 칼을 쥐고 있고, 입가는 피칠갑이었다. 그의 옆에는 시체 한구가 놓여 있었다.

민석을 발견한 어부들은 그가 식인을 한 것으로 봤다. 그 후 10년 동안 남 회장 밑에서 채권추심사업을 맡아왔다. 그러던 민석이 갑자기 남 회장의 지분을 노린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언론 인터뷰에서 배우 장혁은 “배가 난파하면서 어떤 이유로 친구를 죽일 수밖에 없었고 이후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영화에서 민석이 왜 잔인무도한 인물이 됐는지 설명하지 않은 탓에 관객은 민석이 리조트에 집착하는 이유를 모른다.

김길석(유오성)은 강릉 최대 폭력조직의 일원이다. 의리를 중시하고 불법을 지양한다. 순박하고 낭만을 추구한다. 강릉의 평화를 지향하고 ‘식구’끼리 연대한다. 심지어 칼로 누군가를 찔러본 적도 없다. 부하 조직원의 대소사를 챙기고 경찰 대신 마약사건을 뒷수습하는 모습은 그의 면모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길석은 주변인과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이충섭(이현균)이 길석과 다툼을 벌이면 최무상(김준배)이 중재하는 편이다. 셋은 강릉 조폭의 거목 오 회장(김세준)을 따른다. 하지만 오 회장이 리조트 소유권을 길석에게 물려주면서 셋 사이는 미묘하게 엇갈린다. 게다가 민석의 습격까지 더해지면서 강릉 최대 조폭은 와해되는 지경에 처한다.

영화 결말에 이르러 낭만과 의리를 좇던 길석이 민석에 대한 복수에 나서면서 잔인무도한 인물로 변모한다. 조직을 배신한 무상을 처단하고 칼을 쥐고 민석을 제거한다. 절친한 경찰 조방현(박성근)이 말려도 소용없다. 영화는 서사를 달아 이를 설명하지만 썩 와닿지는 않는다.

미디어는 폭력과 깡패의 세계를 너무 미화해왔다. <장군의 아들 시리즈>와 <야인시대>는 1세대 조폭을 낭만주먹으로 묘사했다. 폭력을 휘두르는 일개 깡패를 마치 일제에 맞서 목숨 걸고 상인을 보호하는 수호자로 그려냈다. 근대사를 왜곡하고 폭력을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높은 인기에 묻혔다. 2000년대 인기를 얻은 <조폭 마누라 시리즈>와 <두사부일체 시리즈>는 깡패를 친숙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어리숙하고 우직한 조폭들의 모습은 사회의 악이 아닌 친근한 이웃으로 만들었다.

<친구(2001년)>와 <거룩한 계보(2006년)>, <영화는 영화다(2008년)>, <파파로티(2012년)>, <남자가 사랑할 때(2013년)>,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2019년)>, <퍼펙트맨(2019년)>는 조직폭력 세계에 보통 사람들에게는 부재하는 근사한 미덕 및 가치 등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렸다. <비열한 거리(2006년)>와 <신세계(2013년)>는 조폭세계를 미화하지도 도덕적으로 심판하지도 않아 기존 조폭영화들의 치명적 한계를 상당 부분을 떨쳐내기도 했다. 하지만 관객은 기업형 조폭의 화려한 겉치레에 집중했다.

<강릉>은 평창올림픽과 맞물려 자본에 침식돼 가는 지역을 순박하고 낭만적인 강릉 토박이 조폭의 변화로 그리려고 했다. 문제는 폭력을 자본 삼아 생존·연명하는 조직폭력의 세계가 비열하지 않다는 게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 득도한 인물처럼 보이는 오 회장은 겉으론 농사짓는 초야의 노인이지만, 실상 강릉의 어두운 세계를 주름잡는 깡패에 불과하다. 위기를 앞두고 조직을 배신한 무상이 내미는 배신의 이유도 납득되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기억에 남는 건 평창올림픽이 낳은 강릉의 개발 문제가 아니라 수트를 빼입은 건달들의 화려한 겉모습과 건들거리는 배우들의 걸음걸이 뿐이다. 평창올림픽의 개발 광풍과 향토 조폭과 외지 조폭 간 다툼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지 묻고 싶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