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795년, 정조의 인사 개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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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서 고개를 끄덕여도, 조금만 생각하면 참으로 마뜩찮은 말이 바로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경구이다. 좋은 의미로야 인재들이 모이는 곳에서 경쟁력을 키우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지만, 조금만 틀면 전형적인 수도권 중심 발언이다. 이 말을 조금만 더 확대 해석하면, 서울 출신이 아니면 어디 가서 행세하기도 힘들다는 의미다. 굳이 확대 해석할 필요까지 없다고 해도, 우리 현실이 여전히 그렇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반박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에서 1795년 음력 11월, 선산 출신 노상추盧尙樞는 정조가 문관과 무관의 인사를 각각 담당했던 이조와 병조에 내린 명이 참으로 반가웠다.

영남 남인 출신에 그것도 무과급제자였던 노상추의 관직 진출기는 그야말로 역경의 연속이었다. 1780년 어렵게 무과에 급제했지만, 무과는 과거 합격만으로 관직이나 출세가 보장되지 않았다. 과거 급제보다 더 어려운 선천宣薦에 드는 과정이 남아 있었다. 선천은 ‘선전관 천거’를 약칭한 것으로, 무과 급제자 가운데 장차 선전관이 될 만한 사람을 미리 천거해 두는 제도였다. 무반들의 청요직에 해당하는 선전관은 미리 예비후보를 선정해 두고 거기에 결원이 생기면 그들 가운데 적임자를 선발해서 임명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선천을 단순히 선전관 모집에만 제한적으로 활용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무관들이 관직으로 나가는 관문으로까지 작동했다. 무과 급제자에게 과거 급제는 그야말로 선천에 들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의 시작이었다.

선천에 드는 조건은 분명했지만, 문제는 그 조건에 있었다. 과거는 노력이라도 할 수 있지만, 선천은 그야말로 가문과 출신만 보았다. 가문이 좋아야 했고, 특정 지역 및 서얼 출신은 무조건 배제되었다. 게다가 이 결정권은 선전관청에서 독자적으로 행하다보니, 선전관청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도 중요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노상추가 무과에 합격했던 영조 대에서 철종 연간까지는 무과합격자 가운데 7% 정도만 선천에 들었으니, 무과 급제를 통해 관직에 나간 사람의 수는 그야말로 미미했다. 그러다보니 선천은 서울 사람, 그중에서도 기호 노론의 명망 있는 가문 사람들의 몫이었다. 영남 남인에, 선산 출신 노상추에게는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길이었다.

그나마 노상추는 무관으로 입지전적인 위치에 올랐던 조부 노계정과 양반 신분이라는 게 고려돼 무과 급제 후 2년이 지나서야 겨우 선천에 들었다. 이를 위한 그의 눈물겨운 노력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전히 관직 추천 대상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어쩌다 관직에 나가도 외진 지방으로 발령받기 일쑤였다. 동일한 품계의 문관에게 치이는 것은 당연했고, 무관 내에서도 서울 사람들에 밀려나거나 더 못한 자리로 가는 것도 다반사였다. 추천권을 가진 인사 담당자와의 관계는 그래서 중요했지만, 그들과의 관계어서도 출신지와 문중은 극복하기 힘든 문제였다. 실력과 능력을 갖춘 관료를 임명하겠다는 정조의 의지가 반가울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1795년 11월, 노상추는 병조로부터 ‘문벌과 이력단자’를 작정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노상추만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당시 문무 모든 관료를 대상으로 내려진 요청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관료들(대부분의 관직 진출 가능자 포함)의 모든 인사카드를 새롭게 작성하겠다는 것인데, 이를 작성하는 원칙 속에 정조의 의지가 담겼다. 정조는 이를 새롭게 작성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인사원칙을 천명했다. 우선 정조는 각 도의 고을에서 명성이 높고 관직에 오래 근무한 사람들을 특별히 분류해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지방에서 오래 근무한 사람들의 근무 일수를 넉넉히 계산하여, 서울 출신의 벌족들보다 근무 일수에서 밀리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관료들의 인사명부를 작성할 때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해도 일일이 이름 옆에 주석을 달아 인재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나아가 조선의 경우 군현 단위 지방에는 문‧무과 출신과 가문을 보고 관직을 내리는 음관들까지 지방관 발령을 받았는데, 그 특성에 따라 차등 없이 효율적으로 운영할 방안을 마련해서 보고하도록 했다.

특히, 정조는 관료들이 이력단자를 작성할 때 몇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는 촌수가 멀고 가까움에 상관없이 현달한 일족을 모두 기재하고, 윗대를 기록할 때에도 명성이 있는 먼 선조까지 빼지 말고 기록하게 했다. 지금은 쇠락했다고 해도 가문을 통해 그 사람됨을 파악하겠다는 의미였다. 둘째, 향리가 천거한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이면 반드시 기록하고, 이렇게 천거 받은 사람 가운데 실제 관직 대상자에 한 번이라도 이름을 올렸다면 그 사실도 주석으로 기록하게 했다. 그 사람에 대한 지역과 사람들의 평가를 반영하겠다는 의미이다. 셋째, 재직 시 인사고과로 중中과 하下를 맞은 일이 있으면 그 연도와 이유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탄핵이나 형벌을 받은 사항도 연도와 이유를 함께 기록하게 했다. 인사고과 및 처벌로 인해 실력 있는 인물이 배제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도였다. 넷째, 음관으로 승진한 순서, 무관으로 군문의 직위에 오른 일, 대간의 대상자 여부에 들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모두 기록하게 했다. 경력까지 함께 파악하겠다는 의미였다.

노상추는 새롭게 ‘문벌과 이력단자’를 작성하면서 반가운 마음과 함께 여러 기대들이 교차했다. 윗대 현달한 조상을 적어 달라는 것은 현재 기호노론 중심의 인재 선발 기준을 넘어서겠다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게다가 1792년 영남만인소 이후, 영남을 향한 정조의 따뜻한 시선이 내포된 생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보태면, 노상추의 기대는 좀 더 높아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러한 희망마저 한 밤의 꿈으로 만들었고, 이후 정조의 인사원칙은 단 한 번도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 심지어 세상과 제도가 모두 바뀐 현대에도 정파와 지역, 학벌, 출신 등을 넘어 실력 있는 사람을 골고루 기용하겠다는 원칙은 여전히 꿈에 불과하니 말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