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개에게서 배우는 행복 / 손광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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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지 달포나 되어 보이는 앙증맞은 시바견 네 마리가 산책하는 사람들을 신기한 듯 쳐다보며 꼬리를 흔들어댄다. 짧은 목줄이 불편해 보이건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옆에 있는 어미 개 역시 목줄에 매인 채로 물끄러미 산책객들을 살핀다. 담장에 적힌 글을 보니 분양을 하는 모양이다. 귀엽지만 벌써 늠름한 티가 나는 저런 강아지라면 곧 새로운 주인이 나타날 것이다.

울타리에 갇혀 자유롭지 못하고, 주는 것만 먹어야 하고, 더욱이 곧 강제로 생이별을 경험하게 될 처지인데도 어미 개와 새끼들은 태연하다. 내가 만약 이들의 처지에 있다면 어떠했을까? 새끼를 지켜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어미에 대한 그리움으로 평생을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복수를 다짐하였으리라. 그렇지만 이들은 여전히 꼬리를 흔들며 사람을 반긴다. 분양이 끝나면 이들은 곧 새로운 생활에 적응할 것이고 이제 곧 봄바람과 새싹의 향기를 쫓아 잔디밭을 뛰놀 것이다.

사람은 이들과 무엇이 다를까? 왜 사람은 월등히 나은 환경에서도 행복하지 못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존을 바탕으로 진화한 다른 동물과 달리 고차원 의식을 발달시키는 방향으로 차별화하여 진화하였고, 그 결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인간은 현재의 순간을 과거의 기억으로 반추하고 그렇게 재생된 사태를 미래에 귀속시킨다.

인간은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하고—행복해하기도 하지만—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앞서 걱정한다. 인간은 ‘나’와 ‘타자’를 구분하고, 가까운 것과 먼 것, 양의 많고 적음과 질의 정도를 계산한다. 그리고 자신을 그러한 세상 가운데 위치시켜 우월감과 열등의식을 느끼며 분노하고 좌절한다. 사람은 고차원의식을 발달시킴으로써 지혜를 획득하였지만, 현재의 순간과 있는 그대로를 보는 눈을 상실함으로써 행복을 맞바꾸어 버렸다.

의식 또는 생각은 언어로 표출된다. 어류는 약 10~15개, 조류는 15~25개, 포유류는 25~45개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은 어떨까? 2017년 타임지에 의하면 영어 단어의 수가 100만 개에 이른다고 한다. 문장이 단어의 조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 단어로 만들어질 수 있는 문장의 수는 실로 천문학적이다. 생각의 양이 이처럼 광대하다는 사실은 사람이 그만큼 세계를 잘게 쪼개어 개념화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감성적으로 직관하며 시간과 공간, 곧 세계 속에 주어진 사물들을 범주화하는 능력을 선험적으로 갖고 태어난다고 하였다. 달리 말하면 구분하고 분별하는 특성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불교와 기독교, 도가의 성인들은 분별심을 깨트려야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교의 ‘제법무아’나 ‘유식무경’이 그러하고, 날마다 자신을 비우라는 노자의 ‘위도일손’이 그러하다. 1월 21일 틱낫한 스님께서 입적하셨다. 행복해지려면 생각을 멈추라는 스님의 일생의 가르침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날 일은 그날에 족하다’는 예수의 말씀과 동일하다. 과거의 아픈 상처를 기억하고 미래를 염려함은 시간을 인지하는 우리의 한계성 때문이다.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고 사물에 경계선을 짓는 행위는 공간을 쪼개는 우리의 태생적인 습성에 기인한다.

본질적 한계를 벗어나야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우주 자연의 일부이며, ‘나 아닌 것’이 ‘나’의 또 다른 모습임을 깨달아야 한다. 분리와 경계 짓기, 이분법적인 사고로 과학의 진전을 이룰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 행복은 없다. 너와 내가 하나 되어 우리가 될 때, 저 하늘에 일렁이는 구름과 빗줄기 속에서 나를 만날 때 행복은 거기에 있다. 지금의 순간이 오롯이 나의 전부일 때 행복이 찾아온다. 개의 순수함은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닐까. 사람과 견주어 턱없이 낮은 지적 수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분별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생각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를 사는 그들에게서 행복을 배운다.

손광락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