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안동부사의 교체, 희망과 불안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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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 음력 2월 5일, 예안고을(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일대)까지 안동부사의 교체 소식이 들려왔다. 이번에 안동부사에 임명된 인물은 홍명구였다. 지방관 인사야 늘 있는 일이지만, 이번에는 약간 이례적이었다. 일반적으로 관료들의 인사 추천권을 가지고 있는 도목정사(지금의 인사위원회 성격을 갖는 회의)에서는 왕의 임명권을 보장하기 위해 3명의 대상자를 추천했다. 다만 도목정사에서는 무작위로 3명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1순위부터 3순위까지, 즉 수망首望에서 말망末望까지 순위를 정해서 3명을 추천했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왕 역시 수망에 오른 사람을 임명했다.

그런데 이번에 안동부사로 임명된 홍명구는 말망, 즉 3순위로 추천된 사람이었다. 원래 수망, 즉 1순위로는 이필영이 추천되었는데, 왕은 홍명구를 낙점했다. 물론 이 역시 왕의 권한이기 때문에 이의를 달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례적이기는 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문을 들어보니 당시 홍명구는 조정의 권세를 등에 업고 있는 인물이었다. 인조의 말망 낙점에는 권력층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미이다. 정당한 인사평가를 통해 추천된 인물보다 권세를 등에 업은 사람이 낙점되었다는 소식은 아직 부임하지도 않은 안동부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이 당시 안동부사는 민성징이었다. 민성징은 부임 초기부터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고, 백성들을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이 일상적이라는 기록도 있다. ‘괄괄하다’는 말은 그나마 민성징의 성격을 조금 완화해서 부르는 말일 정도였다. 실제 한 해 전인 1629년 10월 환곡을 거둘 때 그가 행한 폭력은 안동부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한 알이라도 미납된 환곡을 없애겠다는 그의 의지는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사법권을 동원하게 했고, 이로 인해 체납자들에게는 무차별적인 폭력과 구금이 이어졌다.

안동부의 감옥은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로 가득 차, 더 이상 사람들을 수감하기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죄수의 목에 씌우는 칼이 모자라 문짝을 뜯어 칼을 만들 정도였고, 곤장을 어지럽게 치다 보니 죽는 사람까지 나왔다. 이 때문에 환곡을 감당할 수 없어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민성징은 이들 유랑민들까지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 추적하도록 했다. 그리고 도망친 사람들에게 받아야 할 환곡은 그 일족들에게까지 전가해서 어떻게든 받아냈다. 안동부 사람들은 환곡으로 인해 마치 뱀 구덩이에 떨어져서 허둥거리는 사람 같다는 기록이 남은 이유이다. 안동부 백성들 가운데에는 토지나 집, 노비를 팔고 파산하는 사람까지 나왔다.

그러나 민성징에게는 좋은 점도 있었다. 그는 포악함이 개인의 치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특히 송사나 세금 정책을 보면 그의 생각이 어디에 가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보통 송사가 끝나면, 이긴 사람이 베를 지방관에게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받은 베를 본인이 갖지 않고 모두 대동포에 귀속시켰다. 이 때문에 안동부 백성들은 대동포에 대한 부담이 줄었고, 공물 납부가 한결 수월해졌다. 또 지난해 봄에는 재해로 생긴 피해를 경상감사에게 보고하여 백성들이 내야 할 조세를 1결당 28되 가까이 줄였다. 이 조세 감축은 백성들이 허리를 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민성징을 칭송하는 안동부민들도 있었다.

그가 가혹하게 환곡을 거둔 데에도 이유는 있었다. 안동부에는 3만 7천여 석에 달하는 환곡이 체납되어 있었는데, 이는 안동부에 고질적 장기 환곡 체납자들이 많았던 탓이다. 환곡은 원래 백성들의 기근을 방지하기 위한 구휼 정책이었지만, 양반들까지 환곡을 받았다. 그런데 일반 양민들은 환곡을 갚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었지만, 지방관이 함부로 하기 어려운 사족들은 친분이나 권력을 이용하여 환곡을 체납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체납으로 인한 피해는 매번 환곡을 잘 갚고 있는 양민들에게 돌아왔어니, 이를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민성징의 포악한 환곡 징수는 어쩌면 가장 강력한 대책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 지난 10월 안동부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은 결과, 체납된 3만 7천여 석의 원곡이 모두 창고로 들어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양민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지만, 내지 않고 버티던 사족들도 그의 폭압적인 징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지와 노비까지 팔아서 체납된 환곡을 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파산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맞았지만, 그 토지나 노비 역시 엄밀하게 보면 환곡을 갚지 않아 축적한 재산이었다. 환곡 정책의 목적이 백성들을 유랑민으로 만들지 않으려 데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폭압적 환곡 징수는 비판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환곡 창고가 비어 있으면 결국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 환곡 창고를 채울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양민들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환곡 창고가 찼으니 안동부 백성들이 환곡 체납으로 인한 부담 대부분이 사라졌다.

게다가 민성징은 그가 다스리는 동안 백성들을 부역에 차출하거나 세금을 추가로 더 내는 일이 없도록 막았다. 필요할 때마다 경상감영에 안동부의 어려운 사정을 보고하고, 임금에게 상소까지 올려 부가적인 세금을 면제받았다. 또한 기록이 있었던 1630년에는 전세田稅마저 이전보다 훨씬 적게 받아와서, 한 호당 4말만 납부하면 되었다. 게다가 그는 봄과 가을에 거두는 보용미補用米마저 관아 곡식으로 충당함으로써, 민간에서는 보용미를 거두지 않았다. 양민들 입장에서는 환곡 잘 갚고, 가벼워진 전세만 내면 되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안동부사가 바뀌는 시점에서 많은 안동부민들은 “그가 만약 안동에 오래 머무르면 틀림없이 안동부민들이 기댈만한 수령이 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민성징의 포악함만을 생각하면 빨리 바뀌는 게 좋겠지만, 그의 세금 운영을 보면 안동부사의 교체가 아쉬울 만도 했다. 특히 새로운 안동부사가 권력을 등에 업은 사람이라는 소문은 안동부민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포악하기는 하지만, 세금 운영 하나라도 잘했던 민성징이 차라리 명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너도 나도 갖게 되었던 이유이다. 백성들을 생각하는 지방관에 대한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지만, 임명에 대한 권한을 전혀 갖지 못했던 백성들이 갖는 답답함은 그래서 더욱 컸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