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그림자도 없다.’

2010년대 이후 지역독립영화의 원형을 목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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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도 없다.>는 2010년대 이후 대구 독립영화계를 상징하는 얼굴 중 하나이자 ‘큰형님’ (개인적으로는 ‘큰언니’가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긴 하지만) 포지션, 최창환 감독의 단편영화다. 오랜 세월 지역에서 묵묵히 영화작업을 해온 감독의 (첫 장편 <내가 사는 세상>으로 조명받기 이전까지) 세상에 비교적 알려졌던 단편 중 하나다. 최창환 감독의 대표작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정서와 배경이 확인되는 것은 물론 감독 본인의 자전적 경험이 반영돼 현재 왕성히 활동 중인 그의 작품세계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의미가 큰 작품이다.

▲영화 ‘그림자도 없다.’의 한 장면

# 영화 속 한국사회 ‘변방’의 풍경

지역 시민이라면 눈에 익숙한 대구역 건너편 구도심에는 언젠가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길을 좀 더 내려가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동성로 번화가와는 조금 색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장소다. 이 구역에는 노년층과 외국인, 그것도 이주노동자 비율이 두드러진다. 그런 풍경 속에 짐을 잔뜩 든 이가 눈에 띈다. 베트남 이주노동자 ‘투’다. 벤치에서 막막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그에게 또 다른 외국인 청년이 말을 건다. 스리랑카 출신의 이주노동자 ‘랑거’다. 한눈에 봐도 외지에서 온 티가 나는 투에게 랑거는 베트남 출신이 모이는 곳을 알려주고 덕분에 투는 도움을 받는다.

랑거는 영세한 주물공장에서 한국인 청년 인혁과 함께 일한다. 형님동생처럼 지내는 인혁과 랑거, 하지만 공장장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히 드러낸다. 그는 너무 그러지 마라고 말리는 인혁에게 “상황을 아무 것도 모른다”며 핀잔을 준다. 그가 반복하는 이 표현은 인혁에겐 거역할 수 없는 잔인한 운명의 동의어와 같다.

투는 베트남 노동자들의 소개로 장 목사가 운영하는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를 찾는다. 통역을 돕는 흐엉 덕에 상담을 받지만 공장을 무단이탈해 ‘불법체류 외국인’이 될 판이라 장 목사는 인천으로 돌아가길 권한다. 하지만 투는 대구에 남고, 전에 일하던 공장 사장이 임금 체불한 걸 이용해 대구에서 일자리를 찾게 된다. 그는 소개받은 공장에서 랑거와 다시 만난다.

인혁은 공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한다. 공장장은 그를 위로하면서 이게 다 동남아 노동자들이 와서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논리로) 그렇다며 화를 낸다. 인혁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진다. 거기다 랑거와 술을 마신 뒤에 고집을 부리며 오토바이를 타고 귀가하다 사고를 내 합의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막다른 길에 몰린 인혁은 장 목사를 찾아 상담을 받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거기에 공장장이 술에 취해 랑거와 투가 사는 기숙사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뒷수습까지 떠맡아야 한다. 인혁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점점 폭발 직전으로 내몰린다.

▲영화 ‘그림자도 없다.’의 한 장면

# 우리 시대의 ‘비극’을 기록하다

<그림자도 없다.>는 21세기 들어 등장한 일군의 사회파 영화들, 특히 켄 로치나 다르덴 형제의 작품들이 선보인 신자유주의 시대에 만국 공통으로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서늘한 풍경을 ‘대구ver.)으로 구현하는 이미지를 선보인다. 켄 로치의 <자유로운 세계>가 아마 본 작품의 세계관과 가장 유사한 작품일 수 있다. 그저 선량하게 남을 해치거나 괴롭히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지키며 살고 싶었던 이들이 절박한 벼랑으로 내밀리면서 자기 생존을 위해 비슷한 처지의 힘없는 이들을 짓밟게 되는 엄혹한 세상이 이 영화에는 가득히 펼쳐진다.

개인의 선의는 물론 여전히 존재한다. 영화 곳곳에서 그런 순간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인혁은 자기 앞가림도 못한다고 공장장에게 핀잔을 듣지만 편견 없이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심성 착한 청년이고 장 목사는 별다른 대가 없이 사회적 약자인 이주노동자를 돕는다. 흐엉은 같은 처지의 동포를 돕고, 랑거는 자신도 임금체불 문제를 안고 있지만 자신보다 어려운 주변인들을 돌아보는 존재다. 하지만 그들의 소박한 진심은 거대한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사회체제 하에서 작은 위로일 뿐 근본적인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무력함일 뿐이다.

인혁은 점점 궁지로 몰리며 자신이 틀렸던 걸까 혼란스럽다. 직장을 잃은 데다 모아둔 돈도 없고 사고를 수습할 길도 없는 벼랑 끝 상황이 그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형편이 썩 좋지 않은 그는 해고 상황에다 퇴직금도 가불해서 받을 게 없는 딱한 상황이다. 사고 수습을 위한 합의금 마련을 위해 자신을 자른 사장에게 사정도 해보지만 오히려 훈계만 잔뜩 듣고 눈곱만큼의 위로금을 고작 얻었을 뿐이다. 장 목사를 찾아가지만 외국인 노동자는 체불임금 관련 도움을 받는데 자신에겐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의 사고 속에선 이주노동자 상담 지원이 시혜가 아니라 내국인에 비해 법제도상 불리한 점이 많은 차별적 지위 때문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이전에 일하던 직장에서 체불임금을 받아낸 랑거를 보면서 인혁은 분노와 유혹에 빠져든다. 왜 랑거는 목돈이 있는데 나는 이 꼴인 거지? 그의 머릿속에 악마가 깃들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게 결국 공장장 말대로인 걸까? 나는 해고되는데 공장엔 또 다른 이주노동자 투가 채용되는 걸 보며 그의 출구 없는 증오는 더 증폭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파국으로 달려간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른 뒤 그들 앞에 펼쳐진 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먹먹한 감정이 영화를 정주행한 이들에게 스며온다. (음악애호가이기도 한 감독의 선곡이 돋보이는) 어어부 프로젝트의 “무더운 하루”가 그런 스산한 세상의 기운에서 관객이 탈출하지 못하게 물귀신처럼 끌어당기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오직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온 이들에게 닥쳐오는,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진 현대사회의 전지전능한 신-자본주의 체제-이 가하는 폭력은 경제적 어려움을 넘어 영혼을 황폐하게 만든다. <그림자도 없다.>에서 유일하게 입체적 변화를 겪는 ‘진’주인공 인혁이 바로 그 전형이다. 한때는 세상을 떠받치는 근본이던 성실한 노동자는 몰락의 길로 내몰려 추락하며 안간힘을 쓰던 끝에 타락하고 만다. 본 작품 직전에 등장해 한국독립영화계에 파문을 일으켰던 <무산일기>의 탈북자 주인공과도 겹쳐지는 지점이다. (두 작품 모두 감독 본인이 주인공을 맡은 점도 흥미로운 비교점이다)

▲영화 ‘그림자도 없다.’의 한 장면

# <그림자도 없다.>가 보여준 성취에 대해

2010년대 전후에 이와 유사한 세계관을 담은 작품이 속속 등장했다. 영화적으로는 한국 독립영화인들이 서구 예술영화 거장들의 작업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과 함께, 당대 한국사회가 IMF 구제금융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체제의 완성기를 맞이한 사회적 반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본 작품은 그런 ‘시대의 우울’을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영화인이 주어진 조건 하에서 대응한 중요한 사례이자 기록인 셈이다. 비록 어쩔 수 없는 한계들-부족한 자원과 예산, 전문배우가 아닌 외국인 연기자들의 정형화된 역할 같은-이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평균적 완성도나 사회적 주제를 녹여낸 구성, 이야기 구조의 자기완결성 등에서 크게 모자람이 없는 준수한 결과물이다.

영화 속 대구역과 동성로, 성서공단과 북부정류장의 지역적 배경과 함께 펼쳐지는 <그림자도 없다.>는 어둡고 무거운, 보고 나면 우울해지는 영화의 전형과도 같다. 하지만 작품에 담긴 우리가 처해있던 당대 현실의 압축률 높은 작업은 시간이 흘러도 그 가치가 유지되는 유의미한 자료이기도 하다. 아울러 2010년대 이후 순환계를 자체적으로 구축하려 고군분투중인 지역 독립영화계 출발의 순간을 시기적으로나 경향적으로나 보존해둔 가치 또한 만만치 않다.

인적 네트워크 측면에서도 본 작품의 의의는 작지 않다. 크레디트의 스태프 명단에서 이후 지역 독립영화 생태계의 마중물로 활약하게 되는 이름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적 경향의 연속성 측면이건 지역적 배경의 구현에서건 현재까지 지역영화계의 대들보가 된 네트워크의 구축 면이건 <그림자도 없다.>가 보여준 원형질은 주목받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작품정보>

그림자도 없다. Even no shadow
2011|한국|드라마|36‘42“
감독 최창환
주연 응웬 뜩 투(투 역), 망갈라 산지와 코드뚜와쿠(랑거 역), 최창환(인혁 역),
이철진(장목사 역), 황현식(공장장 역), 링 티 흐엉(흐엉 역)
출연 남태우(사장 역)
제작/각본/편집 최창환
촬영 김홍완
녹음 고현석

2011 제12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우수상

김상목 영화칼럼니스트
spanishbomb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