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792년, 형조판서 김문순의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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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正道를 잡아야 할 곳에서는 정도를 잡아야 하고, 엄하게 막아야 할 곳은 엄하게 막은 후에야 비로소 나라가 나라 노릇을 할 수 있고,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정조실록』, 1792년 3월 15일자 기사)

지금의 법무부에 해당하는 형조의 수장 형조판서 김문순金文淳과 형조참판 심환지沈煥之‧이면응李冕膺이 오라에 묶여 대궐로 잡혀 올 때, 그 명을 내린 정조가 한 말이다. 김문순‧심환지‧이면응은 이름만으로도 나는 새가 떨어질 정도였지만, 같은 날 이들은 줄줄이 오라를 받았다. 지금 같으면 법무부 장관과 차관 모두가 구속영장을 받고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이니, 법을 집행하는 형조 입장에서는 이만 저만 체면을 구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에는 사건의 전말이 잘 요약되어 있다. 원래 이 사건은 평택향교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평택에 권위權瑋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서얼이었다. 그는 문장도 뛰어난데다 처세까지 잘 하는 인물이었는데, 정조가 추진했던 통청通淸의 바람을 타고 평택향교에 이름을 올렸다. 통청은 말 그대로 조정의 청요직에도 서얼庶孼들의 임용을 열어 둔다는 의미이다. 청요직이 열렸으니 당연히 관료가 되는 과거 시험도 열렸다. 서얼들도 신분에 상관없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허락하겠다는 의미였다. 서얼들에게 관직도 열렸으니, 지역을 중심으로는 서원과 향교에 출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요구가 빗발쳤고, 이로 인해 서원과 향교도 이들에게 문을 열었다.

그러나 정책이 아무리 강해도, 마음까지 쉽게 바꾸기는 어려운 법. 평택향교에도 기존의 세력들이 있었을 터였고, 이들은 통청을 말 그대로 정책으로만 받아들였다. 권위처럼 서얼로서 새로 향교에 이름을 올린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필연적으로 신진 세력과의 갈등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평택수령으로 이승훈李承勳이 부임했다. 그는 정조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채제공蔡濟恭의 제자로, 천주교에 연루되기도 했다. 그러나 1791년 6월 평택현감으로 부임할 때 그는 유교적 가치와 제사를 금하는 교회법의 충돌로 인해 천주교를 떠난 상태였다.

평택현감으로 부임 전 이승훈에게는 불운을 예고하는 작은 사고가 있었다. 부임 인사를 위해 감영에 들렸다가 돌아오는 길에 말에서 떨어져서 다리를 다쳤다. 이 때문에 그는 부임하고도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향교의 문묘 알현도 못했다. 3개월 가까이 요양한 후에야 겨우 거동했고, 문묘 알현도 이때 이루어졌다. 향교에 들려서 비로소 이승훈은 기존 세력과 신진 세력의 알력다툼으로 소란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후 사정을 들어 본 이승훈은 신진 세력들을 향교에서 몰아내고, 기존 세력들로 하여금 향교의 일을 맡아 보도록 했다. 신진 세력들이 이승훈에게 칼을 갈았던 이유였다.

당시 평택향교 신진 세력들의 수장은 권위였다. 그는 이미 천주교를 떠난 이승훈이 여전히 사학邪學(사특한 학문이라는 의미로, 당시에는 천주교를 지칭했음)의 거두이며, 사문난적斯文亂賊(유교의 도를 해치는 사람)이라고 몰아 세웠다. 부임한 지 3개월 동안 문묘에 배향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었고, 이 일로 이승훈은 파직되었다. 이렇게 되자 신진 세력들은 여세를 몰아 평택향교의 기존 세력들 모두 사학의 괴수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들로 인해 이승훈이 문묘에 배향하지 못했다는 통문을 인근 4개 고을에 돌렸다. 그리고 당시 성균관장이었던 김중순金重淳과 결탁하여 기존 세력들을 몰아내기 위해 같은 소문을 도성에도 퍼뜨렸다.

도성까지 퍼진 소문에 당황한 사람은 정조였다. 통청에 대한 그의 정책이 갈등으로 돌아온 탓도 있는데다, 정조 개혁 정치의 상징적 인물 가운데 한명인 이승훈까지 파직당했기 때문이었다. 상황 파악을 위해 정조는 안핵어사를 파견했고, 김희채가 그 명을 받아 평택으로 내려갔다. 사실 수사가 필요할 정도로 복잡한 사건은 아니었다. 이승훈의 무고는 금방 드러났고, 그 주모자로 권위가 특칭 되었다. 권위는 심문 과정에서 자신이 혼자 한 일이 아니라 성균관장이었던 김중순과 함께 모의했다고 말하고는 매를 이기지 못해 사망했다. 문제는 성균관장이었다. 성균관장은 안핵어사가 다스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고, 이로 인해 이 사안은 형조로 이첩되었다. 이렇게 되자 곤란에 빠진 이가 바로 형조판서 김문순이었다.

형조판서 김문순은 성균관장 김중순과 같은 집안사람이었다. 김중순이 사건의 주모자가 되자, 이 사건 심문하던 형조판서 김문순은 같은 집안사람에게 차마 유벌儒罰을 내릴 수가 없었다. 유벌은 일종의 명예형으로, 유교에 죄를 지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되면 평생 과거에 나갈 수도 없었고, 선비라고 스스로를 칭할 수도 없었다. 조선 유교 정책의 최고 권위자가 지역 향교 사람과 모의해서 무고를 저질렀으니 유벌 대상은 분명했지만, 김문순은 같은 집안사람으로서 그의 명예만큼은 지켜 주고 싶었다. 고심 끝에 유배형을 정조에게 건의했고, 당상관인 두 형조참의 역시 김문순의 편을 들었다.

정조의 분노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형조판서 김문순은 김중순과 ‘같은 집안사람’이기 전에 ‘국가의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문순이 자기 집안사람이라고 처벌을 가볍게 했고 이를 말려야 할 형조 당상관들도 오히려 이를 도우기까지 했다. 국가 기강을 담당하고 있는 형조에서 정작 국가 기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이 발생했으니, 정조의 실망과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형조 당상관 3명은 금갑도金甲島(지금의 진도)에 유배하고 주위에 가시 울타리를 치라는 명이 나온 이유였다. 절도 유배에 위리안치까지 더해진 중형이었다. 형조부터 국가의 기강을 잡으려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탓이었다.

“정도를 잡아야 할 곳에서 정도를 잡아야 하고, 엄하게 막아야 할 곳은 엄하게 막아야 나라가 나라노릇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정조의 말은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이를 실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도의 집행자들이다. 정조는 정도를 집행하는 당사자들이 먼저 정도를 잡지 않으면 나라 안 그 누구에게도 정도를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조의 절실함은 이렇듯 강한 실망과 분노가 되었고, 그 실망과 분노의 정도를 200년도 더 지난 우리들 역시 하필 지금 이 시기에 이렇듯 강하게 느끼고 있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