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첩보 액션 클리셰가 아쉬운 ‘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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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동북지방 대도시 선양. 동북지구 최대의 철도요충지로 동북 최대 규모 시장을 지니고 있다. 특히 한국과 지리적, 문화적 인접성으로 한국인과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야차>는 선양을 전 세계에서 인구 대비 스파이 밀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설정했다. 북한, 러시아 등과 가까워 전 세계에서 스파이가 모여든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국정원은 이곳에 해외 비밀공작팀 ‘블랙옵스’를 운영한다. 블랙옵스 리더 지강인(설경구)은 야차(夜叉)로 불린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검사 한지훈(박해수)은 블랙옵스와 강인에 대한 감찰로 선양에 파견된다. 그는 국내 대기업 비리를 수사하다가 국정원 감찰관으로 좌천됐다. 기소를 앞둔 상황에서 불법적 방식으로 수사를 벌인 사실을 숨기지 않은 탓이다. 대쪽 같은 성격의 지훈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무료한 나날을 보내야 하는 국정원 생활이 지겹다. 그런데 다시 검사로 복귀할 기회가 찾아온다. 국정원에서 블랙옵스가 허위보고를 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본다. 국정원 간부가 중국 선양에서 활동하는 블랙옵스에 대한 특별감찰을 맡을 사람을 구한다. 검찰로 돌아갈 날만 고대하던 지훈은 선양 감찰업무를 선뜻 수락한다.

    <야차>는 교도소를 무대로 한 범죄물 <프리즌(2016년)>으로 데뷔한 나현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나 감독은 미국과 유럽이 주 무대인 할리우드 첩보물과 차별화하기 위해 동아시아 주요 영사관이 밀집한 중국 선양을 무대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내용은 첩보물의 클리셰를 잔뜩 담고 있다. 국가 간 얽히고설킨 관계와 갈등, 비밀공작 내부의 배신 등 설정과 흐름부터 액션과 전개, 반전까지도 뻔하다. 정의감 넘치는 검사, 거칠지만 의리 있는 첩보원 간 관계가 갈등에서 공조로 변화하는 것마저 기존의 첩보물과 다르지 않다.

    “우리 배우, 우리 이야기, 우리 기술로 만들어진 본격 첩보 액션물도 얼마든지 훌륭하게 선보일 수 있다는 야심으로 스태프와 배우 모두가 뭉쳤다”는 나 감독의 말과 동떨어진 결과물이다. 동북아 관계에서 펼쳐지는 음모와 배신을 첩보 액션이 아니라 첩보 심리에 무게를 두고 플롯을 짰다면 감독이 바라는 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야차>는 액션에 과도하게 치중하고 첩보물의 허세를 담아 멋있게 만들기만 했다. 액션 장면은 대중 입맛에 맞춘 겉멋으로 치장되어 있다. 폭탄이 터지는 첫 장면부터 강인과 지훈의 몸싸움, 막판 총격전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한밤중 네온 불빛이 즐비한 화려한 도심의 후미진 주차장에서 모종의 밀거래 현장을 덮친 강인은 가차 없이 폭탄을 투척하곤 총을 든 채 도망자를 뒤쫓는다. 이 첫 장면은 강렬하지만, 신분을 속인 첩보요원의 역할과는 거리가 떨어진다.

    함정에 속아 소총을 든 중국 공안 부대에 맞서 여유로운 몸놀림으로 현장을 탈출하는 장면은 여느 범죄물에서나 자주 봐왔다. 비 내리는 선양의 뒷골목에서 임무를 망친 지훈을 쫓은 강인은 자신의 정체를 아는 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와 격투를 벌인다. 이 장면 역시 다음 장면은 예상 가능할 정도로 뻔하다. 일본 본진에 침투하는 과정에서 블랙옵스의 전략은 다소 뻔하고 긴장감이 높아야 할 전투는 앞날의 전개가 보인다.

    등장인물도 딱히 매력이 없다. 블랙옵스의 팀원 희원(이엘)은 시종일관 진지한 면모만 나타나는 로봇처럼 느껴진다. 홍 과장(양동근)은 노련하고 익살맞은 연기를 보이지만, 존재감이 강하지는 않다. 재규(송재림)는 범죄물에서 흔히 봐온 거친 형사처럼 보인다. 정대(박진영)의 경우 단편적인 태도만 보인다. 영화가 강인과 지훈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탓이다. 조연들의 역할은 중요한 시점에서 그저 배신했다가 처단당하거나, 강인의 조력자 수준에서 그친다.

    영화 제목이 <야차>인 만큼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납치, 감금, 총격전, 살인까지 거리낌 없이 벌이는 강인의 내면을 다루는데 신경을 썼다면 어땠을까. 야차는 인도 신화와 불교에서 사람 먹는 악귀인 동시에 불법(佛法)의 수호신이다. 전 세계 스파이들이 득시글댄다는 중국 선양에서 국익을 위해 불법을 마구 자행하는 강인의 처지를 심도 깊게 그렸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규모 총격전이 벌어지고 총탄이 쏟아져야만 진정한 첩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훈련도 받지 않은 검사가 목숨을 건 첩보요원들 사이에서 활약하는 조악한 액션 시퀀스가 삐거덕거리는 개연성의 보완과 클리셰의 탈피보다 중요한 것인가.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휴전국인 데다, 미국과 중국, 일본 등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이다. 냉전의 산물인 할리우드 첩보물은 냉전의 종식과 함께 명을 다했지만, 한국의 사정은 아직도 첩보물이 인기를 끌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 남북한과 주변국이 벌이는 첩보전이라는 설정과 전개에서 각본과 연출에 힘을 기울였다면 어땠을까. 영화에서 등장인물과 이야기, 반전과 결과 모두 단선적이고 예측 가능하다. 총기 36정과 총탄 7,700발을 썼다는 액션 장면에만 공 들인 흔적이 보인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