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시작이 주는 설레임 ‘4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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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지 않은 눈이 군데군데 보이는 일본 북단 홋카이도의 기차역. 한 가족이 누군가를 배웅한다. 만면에 미소를 띤 것을 보면 열차를 탄 이는 기쁜 일로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보인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도쿄로 온 무사시노 대학 신입생 니레노 우즈키(마츠 다카코)는 도쿄 변두리 동네에 도착한다. 차가운 기운이 돌던 홋카이도와 다르게 도쿄는 온기를 띤다. 거리엔 벚꽃 향이 진하다. 집을 둘러보던 우즈키는 맥이 풀린 듯 방에 앉는다.

번잡한 학기 초 지나쳐 온 강의실에서는 대도시 출신 신입생들이 갖가지 취미와 경험을 자랑한다. 이 자리에서 따뜻한 날에 스웨터를 입느냐는 놀림을 받은 우즈키는 이내 스웨터를 벗어버린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던 우즈키는 활발한 소노 사에코(루미)의 손에 이끌려 낚시 동호회에 가입한다. 이러한 장면들을 지나치면 우즈키가 어떤 인물인 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소심한 성격의 우즈키가 낯선 곳에 오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교시절 우즈키는 밴드에서 기타를 치는 야마자키 선배(다나베 세이치)에게 첫눈에 반한다. 수줍은 우즈키는 야마자키 선배가 졸업한 뒤에도 그 주변만 맴돈다. 그런 우즈키에게 누군가 야마자키 선배의 근황을 알려준다. 도쿄 무사시노 대학에 다니고 근처 서점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들은 우즈키는 그때부터 오로지 같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한다. 교사들마저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성적을 올린 우즈키는 마침내 무사시노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우즈키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고 영화관을 들렀다가 서점에 간다. 야마자키 선배가 일하는 서점이다. 그 주변만 빙빙 돌던 우즈키는 어느 날, 야마자키 선배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자신이 고교 후배이며, 선배가 밴드를 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내비친다. 소극적인 우즈키가 조심스러운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우즈키가 서점 밖을 나서고 봄비가 쏟아진다. 야마자키 선배로부터 살이 몇 개 부러진 빨간 우산을 건네받은 우즈키는 우산을 꼭 돌려주겠다고 말한다. 빨간 우산 아래, 흠뻑 젖은 우즈키가 환하게 웃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4월 이야기>는 1998년 이와이 슌지 감독이 연출한 러닝타임 67분의 짧은 영화다. 대학 신입생의 눈으로 계절에 기대 인생의 봄을 세묘한다. 특이한 점은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끝이 난다는 것이다. 주제가 ‘시작’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설레는 단어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시작이 주는 설레임으로 가득 차 있다. 성인의 문턱에 선 우즈키는 시종일관 살짝 상기된 뺨과 동그란 눈으로 그 시작을 마주한다. 시작은 설레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작의 이면에는 불안도 있다. 남을 경계하는 이웃집 여성은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네 영화관에선 이상한 남성이 다가온다.

하지만 불안한 감정은 길지 않다. 이웃집 여성은 우즈키를 찾아와 카레를 같이 먹고 새침한 표정의 대학 동기는 낚시 동아리를 같이 하며 조금씩 친해진다. 자전거를 타고 허겁지겁 도망치는 우즈키를 끝까지 쫓아오는 영화관 남성은 사실 우즈키가 영화관에서 흘린 물건을 돌려주려던 것이다.

어떤 영화는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반성하는 기회를 만들어주지만, <4월 이야기>는 삶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꿈을 꾸게 만들어준다. 잠시 잊고 지냈던 설레임의 기억, 풋풋했던 추억을 떠올리고 싶다면 <4월 이야기>를 추천한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