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좋은 작품은 유통기한이 없다 ‘중경삼림’

16:43

“지나간 삶을 추억하는 것은 그 삶을 다시 한번 사는 것과 같다.” 로마의 시인 마르쿠스 마르티알리스의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추억을 떠올린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아픈 기억을 생각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추억의 잔상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영화는 사람에게 추억을 되새기는 가장 대표적인 통로가 된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 세상도 영화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낭만적이었을 때 개봉해 30년 가까이 인생영화로 꼽히는 작품이 있다.

1990년대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설렘과 불안이 뒤섞였다. 퇴폐 분위기가 짙게 밴 허무, 우울한 감정은 ‘절망적 낭만’을 낳았다. 21세기를 앞둔 홍콩은 더욱 특별했다. 영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중국으로 반환되기 때문이다. 돌아갈 조국은 민주화 요구 시위를 탱크로 깔아뭉개는 인권 탄압국가였다. 150년 넘게 유지된 영국식 질서는 무너질 게 뻔했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혼혈 도시는 시한부가 됐다.

<중경삼림(重慶森林, 1994년)>은 어두운 낭만을 품었던 홍콩만의 특별한 세기말 분위기를 담아냈다. 중경삼림의 중경은 중국 남서부의 대도시 충칭시의 이름을 땄다. 영화의 무대도 중경맨션(重慶大厦)이다. 이곳은 마약 유통이나 강도 등의 범죄가 빈번하기로 유명했다. <중경삼림>의 영어 제목 <Chungking Express>는 홍콩 충칭시의 포장판매 전문 외식업소다. 영화는 이곳에 드나들며 스쳐 지나간 각각 다른 네 남녀의 서글프면서도 웃긴 사랑을 경쾌하게 그린다. 익스프레스는 바쁘고 외로운 현대인의 일상을 집약적으로 묘사하기에 적격이다.

경찰 223(금성무)은 만우절 농담처럼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 메이를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까지 딱 한 달만 기다리기로 한다.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자, 그는 불안한 마음에 유통기한이 5월 1일로 표기된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은다. 파인애플은 메이가 좋아하던 과일이다. 생일을 하루 앞둔 4월 30일 밤, 어렵게 통조림을 구한 그는 편의점에서 푸념을 쏟아낸다. “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유효기간이 없는 것은 없는 걸까? 내 사랑에 유통기한을 적어야 한다면 만 년 후로 적고 싶다.”

떠나간 연인을 한 달간 기다리면서 사랑의 유효기간이 짧다고 푸념하는 223은 연신 불안하고 슬픔이 가득하지만 애써 밝은 표정이다. 그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조리 먹어 치우며 메이를 잊기로 한다. 그리고 술에 잔뜩 취해 바에 들어서서, 이곳에서 처음 만난 여자와 사랑에 빠지겠다고 다짐한다. 바에는 마약 밀반출을 시도하다가 뒤통수를 맞아 최악의 날을 보낸 마약 밀매업자(임청하)가 들어선다. 그는 마릴린 먼로와 비슷한 금색 가발에 레인코트, 선글라스 차림이다. 223은 끈질긴 구애 끝에 그와 함께 호텔에 간다. 마약 밀매업자가 뻗어 자는 동안 223은 2편의 광동어 영화와 4개의 샐러드를 먹고 동이 트자 호텔을 떠난다.

충칭 익스프레스의 점원 화예(왕정문)는 가게 단골인 정복 경찰 663(양조위)을 짝사랑하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그저 커다란 조리기구를 양손에 든 채 마마스 앤 파파스(The Mamas and the Papas)의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을 흥얼거리며 설레는 감정을 달랜다. 그러다가 우연히 663의 아파트 열쇠를 손에 넣고, 663 몰래 집에 들어가 엉뚱한 짓을 벌인다.

663은 실연의 상처가 짙게 배어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보인다. 그는 담배를 피워대며 감상적인 시구를 읊조린다. 뚜껑 덮인 변기 위에 흰색 속옷 차림으로 걸터앉아 손에 든 비누에 말을 건다. “너무 야위었어. 전엔 통통했는데. 왜 그래? 자신감을 가져.” 이번엔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레를 집어든다. “그만 울어. 계속 울기만 할 거야? 강해져야지. 왜 축 처져 있는 거야?” 633은 결국 젖은 걸레를 비틀어 ‘눈물’을 모두 짜낸다. 빨래를 걷어서 따뜻하게 다림질도 해준다. 그렇게 방 안의 모든 사물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나서야 비로소 잠자리에 든다.

633은 뒤늦게 화예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둘은 카페 캘리포니아에서 첫 데이트를 갖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화예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날아가고, 충칭 익스프레스에 있던 633은 승무원이 된 화예와 마주친다. 꿈꿔온 캘리포니아를 가본 화예는 “별거 없었다”고 말한다. 짝사랑할 때 어수룩한 소년 같던 그는 성숙한 여성이 되어 있다.

<중경삼림>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비슷한 시기 개봉한 <러브레터(1995년)>와 묘하게 엇갈리면서도 같다. <러브레터>의 주인공들은 사랑이 시작됐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챘다. <중경삼림>의 주인공들은 사랑이 끝났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받아들였다. 결국 첫사랑이라도, 옛사랑이라도, 두 영화가 그려낸 사랑의 본질은 같다.

<중경삼림>은 왕가위 감독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출세작이다. <동사서독>을 만들던 왕가위 감독은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 두 달 만에 촬영했다고 한다. 감각적인 대사와 특유의 색감, 사물이나 인물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촬영하는 스텝 프린팅 기법, 카메라를 들고 찍는 핸드 헬드 기법이 더해진 독특한 시각적 효과는 아직도 감각적이다. 좋은 작품은 유통기한이 없다. 수십 년이 지나도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을 이끌어 내어 시공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고 미니 홈피에 스틸컷과 함께 스크랩해둔 구절은 지금 와선 꽤 촌스럽지만, 영화는 여전히 그럴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