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초점] 가족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 /조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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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해봐, 그리고 다신 보지 말자.” KBS울산방송국에 합격했다는 나의 말에 대한 엄마의 대답이다. 4월 17일 오후 1시 12분, KBS울산방송국 채용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떨어진 줄로만 알았던 계약직 취재기자 합격 연락이었다. 기자가 되고 싶은 간절함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내게 해당 제안은 ‘1초 컷’으로 “물론이죠”가 튀어나와야 할 건이었지만, 바로 대답하진 못 했다. 부모님 때문이었다. 일전부터 부모님은 연고 없는 지역의 계약직 때문에 독립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못마땅하다고 했다. 뒤이어 얼마나 벌어서 어떻게 꾸리고 살 거며, 남성 위주의 일터에서 성과 관련된 이슈가 발생하면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등에 대한 걱정을 쏟아냈다. 그리고 내게 그 일을 포기하라 말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나의 각오와 열정이 사그라들진 않았기에 결국 근무 결정을 내렸고, 돌아온 것은 차가운 절연 선언이었다.

이 세상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놀랍게도 한 인간에게 있어 그러한 폭력의 최초 발원지는 가정이다. 가정 내 폭력은 이른바 콩가루 집안부터 정상 가족에까지 아주 폭넓게,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소위 ‘사랑의 매’라고 칭해지는 체벌만이 아니라 언어적 표현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협박성 발언이 있다. 엄마의 절연 선언과 그 뒤로 이어진 아빠의 말도 그랬다. 아빠는 나의 이번 선택 때문에 당신과 엄마의 정신이 돌이킬 수 없이 피폐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부모님 각각의 말은 실현되지 않았으므로, 그 당시 부모님의 발언은 ‘이래도 포기 안 해?’라는 직선적인 폭력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다르게는 시혜적 발언이 있다. 어느 집의 부모나 흔한 농담으로 던지는 “너희한테 좋은 거 다 주고, 난 먹다 남은 거 먹을게.” 이것마저 폭력인 이유는, ‘너는 부모인 내게 빚을 진 거야. 그러니 부모인 내 말을 들어야지’라는 암시가 있고, 자녀로 하여금 죄책감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발화들이 ‘가족이라서’, ‘사랑해서’라는 이유만으로 설명되어도 될까.

‘가족(주로 부모)의 사랑’이 갖는 폭력성은 피해자(주로 자녀)의 병리적 상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가장 흔한 양상은 자기파괴다. 무엇 하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단식·자해 등 다양한 양상의 자기파괴는 약자들의 유구한 반항 방식이자 자기 통제력 확인 방식이었다. 이는 책 『신데렐라 천년의 여행』에서 제시된 심청전 재해석을 통해 더욱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책은 심청전에서 심청의 희생을 피학적 공격성의 표출이라고 말한다.

또한 황제와 결혼한 심청이 ‘맹인 잔치’를 벌여 아버지를 찾으려 한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이 희생했음에도 아버지가 여전히 시각장애인으로 지냄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그 희생의 본 의미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아버지에게 죽음으로써 가장 큰 불효를 하고, 아버지에 대한 본인의 적의가 커지기 전에 자신을 스스로 벌하고자 한 행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가족에 의한 피해자가 스스로를 곤경에 몰아넣는 행위다. 심청의 예시는 사실상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고, 그보다 덜한 경우라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부모님에 대한 반항 심리로 대학 생활을 잠시 게을리 한 적이 있다. 거의 평생을 대구에서 살아온 나는 고압적인 부모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서울권 대학교를 지망했다. 하지만 결국 최종 합격을 하지 못해, 대구에 있는 경북대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부모님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부모님의 자랑거리’였다. 부모님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부모님의 자랑거리라도 아니고 싶었다. 그래서 한때 애꿎은 학교를 미워하며 학점도 인간관계도 관리하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그 실책의 여파를 해결하는 데 많은 노력이 들었다.

그렇기에 가족에 의한 피해자에게 가장 이상적인 선택지로 자기 파괴적이지 않은 반항을 제시할 수 있으나, 노력만으로 상황이 해결되진 않는다. 자기 파괴적이지 않은 반항, 즉 건강한 반항은 자신을 부모에게 반감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쓰지 않고, 자신의 안녕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과감한 결단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책 『개로 길러진 아이』는 가족 심리 치료사 사이에서 ‘불확실한 비참함보다 비참하다는 확신이 낫다’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말한다. 가족으로 인해 불행한 이들이 가족의 폭력을 겪을 땐 익숙한 상황이라며 안정되어 있지만, 행복할 땐 언제 폭력이 또 닥쳐올지를 점치며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또한 모순적 심리를 이겨내고 건강한 반항을 선택한다고 해도 또 다른 부담이 닥쳐온다. 이를테면 부모님의 상습적인 폭행에 순응하던 피해자가 어느 날 무력감을 떨쳐내고, ‘날 함부로 때리지 마’라고 말하며 건강한 반항을 감행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시도는 자신을 위해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상대에게 맞선 경험이므로 정신적 자산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그 반항 때문에 더 가혹한 폭행을 당하는 등 험한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에게 변화를 요구하기보다,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바꾸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가족 사랑 신화’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가족 사랑 신화는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폭력을 전부 사랑 때문이라고 치부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용서하는 성역화로 정의한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의 신화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인안나는 사랑과 전쟁을 함께 관장하는 신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 늘 붙어 다녔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사랑이 늘 최소치의 폭력을 동반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우리는 그 정도를 조절해야만 파국에 이르지 않을 수 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5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의식적인 언행이 가족을 폭력에 노출하지는 않는지도 되돌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