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임진왜란 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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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을 기점으로, 만 2년 전인 1590년 3월은 무심코 보기에 태평성대나 다름없었다. 물론 국내 상황만 가지고 보면 정치는 부침이 심했고 왜구나 오랑캐로 인해 남해안이나 국경 지역은 시끄러웠지만, 큰 틀에서 정치는 안정되어 있었고, 건국 이후 200여 년 가까이 전쟁 없는 성세가 지속되고 있었다. 경주 선비 류정의 인식으로, 당시 지방 지식인들의 일반적 상황 인식이었다.

1590년 음력 3월 20일, 경주 송호에 사는 류정의 집으로 반가운 친구들이 찾았다. 최홍국과 김공망, 조언성, 정화숙, 정덕계 같은 인물들로, 평소 깊은 친분을 가진 친구들이었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3월 초 부산을 다녀온 친구의 이야기가 관심을 끌었다.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5명의 친구 가운데 누가 부산이 다녀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최근 부산에서 들은 소문 내용은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중요 내용은 부산에서 만난 90세 노인이 들려준 이야기였다. 당시 그 노인은 자기 평생 보지 못했던 불안한 일이 부산 바닷가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중이라고 했다. 부산 바닷가까지 톱밥과 나무 사다리가 밀려왔다가 떠내려가곤 하는데, 이게 벌써 5년째라는 것이었다. 노인의 추측에 따르면 이는 필시 왜국(일본)에서 배를 만들고 있기 때문인데, 이처럼 많은 부산물이 부산까지 떠내려올 정도라면 적은 양의 선박 건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했다.

이 정도로 많은 선박을 건조한다면, 그 목표는 일시에 많은 군사를 바다 건너로 보내는 일 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떠내려오는 톱밥과 나무 사다리를 머잖아 닥칠 대규모 왜군의 침략으로 읽었던 이유였다. 실제 조선의 남해나 도서 지역을 괴롭혔던 왜구들의 활동 거점이면서 조선을 대상으로 한 일본의 외교 거점은 대마도였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의 거리가 50km도 안 되니, 대규모의 선박 건조가 대마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톱밥이나 나무 사다리가 떠내려오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노인의 짐작은 합리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노인의 생각은 그 개인만의 생각이 아니었던 듯하다. 부산을 중심으로 동해안 백성들의 민심이 그러했다. 이 때문에 노인의 생각을 방증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기이한 일들도 이쪽저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소문에 불과한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당시 류정에게 이야기를 전해 준 친구는 부산에서 경주로 돌아오는 길에 동해안을 잠시 들렸는데, 거기에서 자신이 직접 기이한 일을 보기도 했다. 당시 그는 많은 사람들이 해안가에 모여 있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가 보았더니, 큰 바위가 바닷가에 옮겨져 있었다고 했다. 어떻게 바닷가로 옮겨졌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큰 바위였는데, 이게 갑자기 해안가에 옮겨져 있으니, 사람들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에는 이상하게 생긴 개 한 마리가 동네 뒤에 있는 산에서 출몰했는데, 이 개가 온 고을을 시끄럽게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개를 잡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잡을 수 없었는데, 그 개는 밤마다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슬피 우는 통에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톱밥이나 나무 사다리 등으로 인해 불안한 백성들은 이 개의 울음을 변란에 대한 예고로 해석했던 터였다. 이러한 와중에 큰 바위까지 바다로 옮겨지니 미래에 대한 예측이 확신으로 변하기에 충분했다. 민심이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합리적인 증거에 기이한 일까지 겹치면서, 백성들의 불안은 극도로 커졌다. 이 이야기를 들은 류정 역시 친구들과 밤새도록 변란에 대해 근심을 할 정도였으니, 일반 백성들은 어땠을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방에 사는 선비들에 불과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록 지방이라고 해도 그 지역을 대표하는 선비들의 상황이 이럴진대, 일반 백성들이야 말해 무엇할까 싶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 전에 기록된 이들의 민심은 단순한 기우나 미신이 아니었다. 잘 아는 것처럼 불과 2년 뒤 일본의 대규모 침략이 있었고, 조선은 미증유의 전쟁을 겪었다.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은 전쟁으로 인해 조선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떠밀려온 톱밥과 나무 사다리 같은 증거를 보면서, 백성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만 했다면 일어나지 않았거나, 피해가 훨씬 적을 수 있는 일이었다. 태평성세였던 탓에 경고에도 둔감했고, 백성들의 목소리와 다양한 징후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문제는 434년이나 더 지난 2024년 음력 3월의 대한민국의 상황이다. 오늘 우리의 민심 역시 1590년 3월만큼이나 흉흉하다. 톱밥과 나무 사다리가 부산 앞바다에 밀려든 것만큼 많은 국가 경제 지표들이 하락하고, 국가 리더의 신뢰 지표 역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많은 확실한 증거들 뒤로 미신 수준의 흉흉한 소문들까지 돌고 있다. 풍수나 무속까지 정치 평론의 대상이 되면서 이게 2024년의 대한민국인가 싶다.

그러나 국가는 여전히 확실한 지표에 둔감하고, 불안해하는 국민들의 마음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지방에 있는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 역시 434년 전의 류정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래서 어쩔 심산인지 정부에 묻고 싶지만, 그마저도 입을 막을까 싶어 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