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도 정당화되는가? ‘킹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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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政治).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을 말한다. 정치인은 국민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상호 간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을 해야 한다. 정치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권위를 얻기 위해선 다수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정치판에서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이 난무한다.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려면 지지층 결집과 상대 진영 와해를 위한 여론 조작, 편 가르기, 프레이밍 등을 적절히 구사해야 한다. 패권을 다투는 정치인의 곁에 건곤일척의 꾀를 내는 책사들이 가득한 이유다.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고 미래도 그럴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여·야간 네거티브 공세가 뜨겁다. 정계에서 네거티브는 상대방의 지지율을 끌어내릴 비책으로 통한다. 원칙적으로 상대방을 따라잡는 전략은 네거티브밖에 없다. 네거티브에는 뛰어난 지략과 전술이 필요하다. 사실에 얼마나 근거하느냐도 중요하지만 타이밍, 제기할 시기 역시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투표일을 한 달여 남긴 26일, 50년 전 네거티브 전략으로 선거판을 뒤흔든 선거 전략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개봉한다. 변성현 감독이 연출한 <킹메이커>다. 배우 이선균이 연기한 서창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참모로 활동한 실존인물 엄창록 씨다.

엄 씨는 ‘마타도어의 귀재’, ‘선거판의 여우’라고 불린 선거 전략가다.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읍에서 태어났고 한국전쟁에서 북한 인민군 심리전 담당 하사관으로 일했다. 휴전 뒤 강원도 인제군에서 한약재상을 하다가 1961년 계속 낙선하던 김 전 대통령을 만났다. 김 전 대통령이 재보궐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처음 당선되는데 그의 전략이 큰 기여를 했다. 1970년에는 김 전 대통령이 당내에서 승리가 점쳐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을 이기고 제7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 후보 경선에서 대선 후보가 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엄 씨의 전략은 유권자에게 상대 정당인 척 비호감을 사는 것이다. 양담배를 물고 거드름을 피우며 여당 후보를 찍으라면서 유권자에게는 싸구려 담배를 건네거나,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넣은 돈봉투를 여당 후보 이름을 돌리는 게 대표적인 방식이다. 당시 귀한 고무신을 여당 후보 이름을 돌린 뒤 잘못 돌렸다며 모두 회수하고, 동네에서 가장 큰 식당을 여당 후보 이름을 통째로 빌려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 헛걸음하게 만들어 여당 후보를 욕하도록 하는 방법도 썼다.

엄 씨는 유권자의 마음을 끄는 데도 탁월한 전략을 펼쳤다. 처음 들르는 동네 주민의 집에 고급 비누를 두고 간 뒤 다시 그 집을 방문해 친밀감을 얻고 가족관계를 파악할 때쯤 유권자의 표심을 끌어내는 언사로 호감을 샀다. 조직 내의 표을 잡기 위해 지구당 위원장을 포섭하지 않고 말단 대의원들을 만나 소외감을 느끼는 그들의 표를 얻어냈다. 그의 전략과 전술은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권력 남용과 금전 이용 등의 주된 방식을 깨고 여당을 위기로 몰아갔다.

김 전 대통령은 대선을 석 달 앞둔 1971년 1월 엄 씨를 자신의 보좌역에 임명하고 그 달 27일 김 전 대통령의 자택에서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김 전 대통령의 조카 김홍준 씨를 범인으로 몰았고, 대선의 화약고 같았던 사건 수사 진행은 지지부진 했다. 이 과정에서 중정은 폭발사건을 김 전 대통령의 자작극으로 몰면서 엄 씨를 배후로 보고 오랜 시간 조사했다.

엄 씨는 1971년 대통령 선거 운동 도중 갑자기 실종됐다. 그는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영남지역에 대대적인 전단지가 뿌려졌다. 내용은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김대중을 대통령으로”였다고 한다. ‘지역감정’은 박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큰 몫을 했다. 엄 씨는 박 전 대통령이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된 한 달 뒤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안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일이 있어 한동안 속리산에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사회를 완전히 등지고 은거하며 살았고 호흡기 질병을 앓았다. 1988년 사망했다.

엄 씨의 실종에는 1970년 12월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된 이후락이 관여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일보에서 펴낸 <남산의 부장들>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고, 중앙정보부는 엄 씨의 전략과 전술을 분석해 보고서를 작성할 정도로 예의주시했다. 김 전 대통령의 국회의원 당선에 기여한 엄 씨를 지속적으로 회유했다.

그러나 엄 씨는 김 전 대통령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실제로 박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과 신민당의 기세를 두려워했고, 중앙정보부는 공작기술을 총동원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원들도 음지의 손에 희생당했고 중정에서 엄 씨를 데려갔다고 고(故) 이희호 여사는 회고했다. 대선을 앞두고는 박 전 대통령의 쪽으로 영입되지 않는 엄 씨의 실종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이후락 전 중정부장이 관여한 것이라는 추측에 힘이 실리는 대목이다.

엄 씨의 실종 이후 지지율이 밀리던 박 전 대통령 진영에서 경상도를 중심으로 지역감정론을 창출했고, 김 전 대통령 측근들은 엄 씨의 솜씨가 보인다면서 상대편에 강제로 합류한 것으로 크게 의심했다. 엄 씨는 대선 이후로는 그렇게 좋아하던 김 전 대통령과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평생 피해 다녔다고 한다.

2022년 대선 역시 네거티브가 판을 친다. 어떤 인물과 정책이 더 나은지 검증한다고 하는데, 정책은 실종되고 사회 각계각층에선 반목과 갈등을 겪고 있다. 이는 누가 당선되든 국정 운영 실패를 불러오고 사회구성원의 불신과 위화감을 심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오직 당선만을 위해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극단적 네거티브를 재연할 것이다.

피해는 국민의 몫이다.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누구를 지지하느냐를 따지고 면면을 뜯어보는 것이 아니다. 누가 당선되든 그들의 집권 비전과 전략을 검증하고 정책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좀 더 나은 정책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파렴치한으로 찍히고 얼치기 정치인으로 평가받던 인물들이 재평가를 받는 것만 봐도 네거티브가 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엄창록은 대중에게는 낯선 인물이지만 한국의 선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비록 승자독식의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그의 네거티브는 야당의 씨를 말리려는 공화당에 맞선 생존의 몸부림이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되는가?”다. 냉소를 부르는 대선 정국에서 선거사의 오래된 딜레마를 엄창록의 이야기를 보며 되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