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가족을 위해’ 야합하고 뒤통수 치는 그, ‘범죄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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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보안사령부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민간인 사찰 폭로 이후 국면 전환을 위해 추진된 건달 소탕작전이 배경인 <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는 명작으로 꼽힌다. 영화는 조직폭력배들이 활개치던 시절의 이야기를 주제로, 무게감 있는 해학과 풍자를 통해 한국 사회의 폐부를 들쑤셔 놓았다. 제4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을 받았고, 언론과 관객 모두에게 호평을 얻었다.

평단에서는 지겹게 반복돼오며 장르적 생명력을 다한 한국형 조폭영화의 신기원을 이뤘다고 극찬했다. 숱한 유행어와 패러디를 낳을 정도로 대중의 화제가 됐다. <범죄와의 전쟁>이 세 번째 장편영화 연출작이던 윤종빈 감독은 한국영화계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친구(2001년)> 속 의리와 우정이나 유머를 쏟아내는 <두사부일체> 시리즈, <조폭마누라> 시리즈 속 정감어린 모습은 없다. 1982년 부산 세관에서 일하는 최익현(최민식)은 밀수품을 눈감아 주고 뒷돈을 챙기는 비리공무원이다. 어느 날 피해자의 고발로 비리공무원들의 범죄가 들통날 위기에 처한다. 익현은 부양 식구가 적다는 이유로 총대를 메고 직장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마약밀수 현장을 덮쳐 필로폰 10㎏을 얻게 된다. 공무원을 순순히 그만두고 마약을 몰래 팔 생각이던 그는 부산건달 최형배(하정우)와 손잡는다. ‘경주 최씨 충렬공파’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건달두목 형배와 먼 친척이라는 이유로 조폭의 ‘대부님’이 된 익현은 폭력과 권력에 물들어간다. 형배의 후광을 업고 조폭이 연루된 사업에 발을 들인다.

건달도 일반인도 아닌 ‘반달’로 통하는 익현의 무기는 ‘인맥’이다. 그는 ‘인맥’으로 공권력과 야합하며 부를 축적한다. 사회를 좀먹는 근본적 폐해인 학연과 지연, 혈연을 내세워 위기를 넘기고 사업을 확장한다. ‘경주 최씨 충렬공파’는 비장의 카드다. 익현은 먼 친척에게 뇌물을 건네어 최주동 부장검사(김응수)에게 접근한다. 익현과 주동은 14촌 관계로 사실상 남이다. 익현은 주동에게 금 두꺼비를 건네며 수감된 형배를 풀어주고, 자신을 폭행하고 윽박지르는 강골 검사 조범석(곽도원)에게서도 벗어난다.

검사 범석이라고 인혁의 ‘인맥’을 벗어나지 못한다. 범석은 부임하는 곳마다 현지 폭력조직을 일망타진하면서 조폭들 사이에서 ‘해방 이후 최고의 악질’로 불린다. 그가 조폭 일망타진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정의감이 아니라 승진 때문이다. 처음에는 인맥과 뇌물에 구애받지 않지만, 결국 익현의 인맥을 통해 고위직에 오른다. 경찰도 다르지 않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자 형사들은 공중전화기에 몰려 조폭들에게 정보를 전달해준다. 위압적인 태도로 조폭들을 대하던 경찰은 경찰서장과 친분 있는 익현이 되려 떨어대는 허풍에 위축된다.

영화 속 나쁜 놈들 중 최악은 익현이다. 줄을 갈아타며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익현은 아부하고 거짓말하고 야합하고 뒤통수를 쳐서라도 무조건 살아남는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먹고살 만큼 돈을 벌었지만, 그의 욕심은 끝이 없다.

영화 속 ‘인맥’은 낯설지 않다.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학연과 지연, 혈연의 폐해가 만연하다. 인맥을 이용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다. 청렴과 공정, 합리 등을 운운하지만, 학연, 지연, 혈연은 거미줄처럼 엮어 풀리지 않는다. ‘돈과 권력’에 따라 교묘히 조작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사건들은 매년 드러났다. ‘법과 양심’은 허울로 남았는데, 양심 회복이 가능할까. 헌법의 원칙인 공정경쟁하의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는 사라져버리고 불공정한 구조가 관행이 된 세상에서.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