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빚을 빚으로 막아야 하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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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봄, 선산의 선비 노상추는 인생 최고의 시기 가운데 하나를 보냈다. 9년의 낙방 끝은 비로소 무과에 급제하는 영광을 얻었다. 비록 문과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무과 역시 과거는 과거였다. 1779년 초시 합격 이후, 한양에 집을 얻고 동대문 근처 공터에서 매일 쏘아 댄 화살이 얼마였는지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화살을 멀리 날리기 위한 근육이 자리를 잡고, 과녁을 정확하게 뚫을 정도의 섬세함이 몸에 익었을 때 비로소 노상추는 무과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을 다 얻은 듯했다. 그러나 과거 합격과 동시에 그의 발목을 잡은 것도 있었으니, 그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엄청나게 늘어난 빚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고시나 명문대학 입시가 그런 것처럼, 과거시험 합격 역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비용으로 지불해야 했다. 무과 합격을 위해 노상추는 최소 9년의 젊음을 고스란히 지불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용이야 미래를 위해 그러려니 할 수 있었지만, 실제 몸으로 체감되는 댓가 가운데 큰 것은 대과 시험을 위해 도성에 머물면서 활만 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었다. 노상추는 서울 김잇복金㗡卜의 집에서 머무르면서 숙식을 해결했는데, 대과를 치르는 동안에는 떨어진 노잣돈마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대과 시험을 위해 자신에게 맞는 활을 마련하고, 모든 신경을 활쏘기에만 집중한 탓이었다.

그렇게 해서 어렵게 얻은 무과 합격이었지만, 그간 먹고 자는 데 사용된 노자는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다행히 과거에 합격이라도 하니, 김잇복은 노상추가 집에 가서 그 비용을 마련해 보내겠다는 데 어렵게 동의해 주었다. 그나마 과거 합격으로 신용도가 높아지면서, 김잇복 역시 빚을 받을 가능성을 높게 점쳤던 탓이었다. 하지만 이 일이 벌써 두 달 전인 지난 3월의 일이었다. 과거 합격 후 고향에 내려온 노상추는 당장 갚을 수 있을 것 같은 돈이 쉽게 마련되지 않아 적잖게 당황했을 터였다. 도문연到門宴(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고향에서 친척들을 불러서 여는 연회)을 시작으로 온갖 축하연이 지속되면서, 예상에 없던 지출도 이러한 당황에 한몫했다. 게다가 보릿고개가 한창 진행되는 시점이다 보니, 우선 가족과 주위 사람들 건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김잇복에게 갚아야 할 돈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눈앞에 놓인 지출 대상이 늘 우선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5월이 넘어섰고, 노상추는 원치 않게 악성 채무자가 되어 있었다.

음력 5월 14일, 한양에서 구미까지 노상추를 찾아온 김잇복을 마주보면서 노상추는 겸연쩍은 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 좋은 김잇복이 오죽했으면 한양에서 구미까지 먼 길을 재촉했을까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김잇복을 대하니, 노상추 역시 극심한 채무자의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정말 갚아야 할 돈으로 인해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일단 김잇복을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줄 테니 며칠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과거 준비로 집안 살림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탓에, 노상추 역시 돈을 마련하기 쉽지 않았다. 결국 주위 사람들에게 돈을 꾸어서라도 김잇복의 돈은 갚아야 할 상황이었다. 빚을 빚으로 돌려막아야 하는 일이 노상추에게도 닥쳤다.

다음날부터 노상추는 동분서주하면서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녔다. 그러나 돈을 빌리는 일도 녹록치 않았다. 노상추가 돈을 만들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을 본 김잇복이 차마 노상추를 채근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해 농사가 끝날 때까지 태무심하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노상추 입장에서는 이제 체면을 차릴 상황이 아니었다. 돈을 구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되는 곳이면 어디든 문을 두드렸다. 심지어 평소 그리 친하지 않았던 신석호申石虎의 집을 찾아 돈을 빌려 보려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 인심이란 게, 노상추가 돈을 빌리러 왔다는 사실을 알자 출타했다는 핑계로 신석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금오산 자락까지 어렵게 찾은 발걸음은 민망함만 가득 담은 채 되돌아가는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합격보다 빚을 내는 게 더 어려운 것 같았다.

결국 친구들과 가족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친구들과 동생 노억까지 나서서 이리저리 적은 돈도 빌려 액수를 맞추었다. 빚내기 대작전 2개월 만에야 겨우 김잇복에게 지불해야 할 돈이 모였다. 정말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두 달 넘게 채무자를 집에 두고 돈을 구해야 하는 절박함이 만든 결과였다. 친구들과 동생들에게 약속한 날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돈을 갚아야 할 날이 찾아오면, 다시 이러한 일이 되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한숨을 돌렸다. 미안하고 겸연쩍은 심정으로 돈을 건넨 노상추는 막상 그가 한양으로 떠난다고 하니 정이 들어 섭섭하기까지 했다. 김잇복 자신도 예상치 못한 두 달의 타향살이였다.

“과도한 대출, 고통의 시작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빚을 권하는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도 노상추의 상황은 남일 같지 않다. 특히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해야 하는 우리네 청년들이 노상추의 첫걸음처럼 빚에 담보 잡혀 있는 상황이 더더욱 그렇다. 노상추야 친구들과 가족들의 도움이라도 받았지만,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과정마저 빚으로 살 수밖에 없는 청년들은 그런 도움에서마저 소외되어 있다. 빚을 빚으로 돌려막아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 노상추에게는 한 번 지나가는 삶의 과정이었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청년들은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마저 찾기 어렵다. 김잇복처럼 아무런 채근 없이 기다려주는 채무자도 존재하지 않는 우리 현실을 청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