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규 칼럼] 의병정신의 토대는 신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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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 구한말 역사학자 박은식의 말이다. 필자는 지난 6월 11일부터 3일 동안 영천시 ‘영천의병’전시관을 찾았다. 기록물을 꼼꼼히 보다가 영천의병이 피 흘려 지킨 역사의 현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영천의병이 지킨 역사의 현장에서 땀 흘리며 1592년 임진왜란 당시를 상상해 보았다. 조선의 관군은 연일 왜적에게 패배했고, 도주하기 바빴다. 선조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했다. 왜적들은 백성을 약탈하고 도륙했다. 보다 못한 지역의 선비와 백성들이 일어났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자발적이다. 기꺼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그래서 의병(義兵)이라 부르고 이들의 정신을 의병정신이라 부른다.

▲영국 ‘데일리 메일(Daily Mail)’ 종군기자로 한국에 왔던 캐나다의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Frederick A. Mackenzie) 기자가 촬영한 ‘항일의병’. p.206 [사진=프레더릭 아서 맥켄지,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의병정신은 왜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 신뢰 속에서 싹이 텄다. 임진왜란 때 누구보다 빠르게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는 “나라를 지키는 일을 관군에게만 맡길 수 없다”는 기치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자 의령 지역민들이 기꺼이 따라나섰다. 지역 사람들은 곽재우 장군의 삶을 줄곧 보아왔다. 그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재지 않고 모여들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한 사람도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

영천의병도 똑같았다. 임진왜란과 구한말 당시 죽음을 무릅쓰게 한 것은 서로가 신뢰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가장 먼저 빼앗긴 성을 되찾은 영천성 수복전투(1592년 7월 27일)는 권응수를 비롯한 여러 의병장들이 굳게 뭉쳐 싸운 결과였다. 이항복은 백사집(1598년)에서 명량해전과 버금가는 승리라 했다. 선조실록(1603년)에는 선조가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3대 승리로 평가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경상좌도의 안전이 영천성 수복전투 승리 결과라고 했다.

구한말 대표적인 을미의병 중 산남의진(山南義陣)은 영천에서 일어났다. 산남은 고려시대 이래 영남(嶺南)을 지칭하는 다른 말이다. 신뢰로 뭉친 연합부대였다. 1대 의병대장은 정용기 장군이고, 2대는 그의 부친인 정환직 장군이다. 부자가 의병대장으로서 싸우다 전사했다. 산남의진은 1906년부터 경술국치까지 가장 오랜 기간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나라를 빼앗긴 이후 산남의진에 참여한 많은 의병들은 간도로 건너가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의병정신의 핵심은 신뢰이다. 의병은 계급과 신분 구분 없이 혼연일체가 되어 목숨 바쳐 싸울 수 있었다. 의병장들은 위기 때마다 항상 선봉에 섰다. 서로 신뢰하기 때문에 결심이 빨랐다. 지휘 체계가 간명했다. 그 누구도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심 없이 싸웠다. 그 누구도 특권이 없었다. 오직 나라를 지키는 일념뿐이었다. 국난극복의 DNA, 의병정신은 서로 간 신뢰가 있을 때야 발휘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