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호랑이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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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에게 ‘호환과 마마’는 최상의 공포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지만, 1980년대 VTR이 처음 보급되기 시작했을 때 불법 음란물의 위험이 ‘호환과 마마’보다 더 하다고 경고했던 문구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천연두를 의미하는 마마에 대한 공포는 코로나19를 겪었던 현대인들에게 낯선 풍경이 아니다. 전염성도 높은데다 치사율도 높았으니, 그 공포가 얼마나 심할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마마는 살아남아도 얼굴에 흉터(이를 곰보라고 불렀다)가 평생 남으니, 보는 이들이 공포에 떨게 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이러한 마마보다 앞에 놓은 공포가 호환이다. 호환虎患, 말 그대로 호랑이에게 당하는 우환이다.

1764년 음력 5월 27일, 노상추가 사는 선산(현 경상북도 구미시 일원)은 호환으로 인해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웅곡면熊谷面 일촌一村에 사는 남씨 일가와 심씨 일가가 당했는데, 문제는 참상의 크기와 호랑이의 기이한 행태였다. 보통 호환의 경우 직접 대상이 되는 사람 한 명이 희생되거나, 힘들게 키우고 있는 가축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체로 호환은 가뭄 등과 같은 자연재해가 만든 결과이기 때문이다. 극심한 흉년으로 산에 먹을 것이 없어지면, 호랑이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민가를 덮쳤기 탓이다. 그런데 웅곡면의 남씨 일가와 심씨 일가의 호환은 이와 달랐다.

이 이야기는 남씨네와 심씨네 집 아들들이 뒷산에 올라 호랑이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들이 만난 호랑이는 새끼 네 마리를 데리고 있었던 어미 호랑이 인지라 예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새끼를 지키기 위해 포효하는 호랑이 앞에서 목숨을 건 탈주를 감행해야 했다. 그때 이들의 눈에 띈 것은 네 마리의 호랑이 새끼였다. 달아나면서 새끼를 잡아 어미를 위협했고, 다행히 이들은 네 마리의 새끼 호랑이를 희생시키면서 도망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 역시 두 아이가 살아 돌아온 것은 천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게 불행의 씨앗이 될 줄은 그들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 새끼 네 마리를 잃은 어미 호랑이가 그로부터 나흘 뒤, 남씨네와 심씨네가 있는 마을로 내려왔다. 호랑이는 먼저 심씨네에 들어가서 외양간에 묶어 둔 큰 소를 물어 죽였다. 이로도 성이 차지 않은 호랑이는 온 집안을 들쑤시면서 간장 항아리를 비롯한 장독대 물건들을 깨부수고, 가마솥까지 밀쳐 버렸다. 다행히 심씨 집에는 사람이 없어 인명 피해는 없었다. 호랑이의 분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심씨네 집을 거쳐 남씨네로 온 호랑이는 자신의 모든 분노를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남씨네는 아녀자들과 아이들이 그 시간에 집에 있었던 탓에, 그들 모두 참변을 당했다. 남씨의 처와 며느리, 그리고 딸 두 명과 아들 한 명까지 모두 5명이 호랑이 이빨에 희생되었다. 근처에 있던 승려 한 명과 이 소식을 듣고 급히 호랑이를 잡기 위해 달려 온 포수도 호랑이의 이빨을 피해가지 못했다. 새끼를 잃은 호랑이의 분노에 7명이 희생되었다.

더 기이한 것은 호랑이의 태도였다. 모든 일을 마친 호랑이는 남씨의 집 방을 차지하고 누운 채 나올 생각을 않았다. 소도 물어 죽이기만 했을 뿐 전혀 먹지 않았으며, 이는 죽인 7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호랑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음을 알려주려는 듯했다. 그리고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듯, 남씨의 집 방에 틀여 박여 있었다. 관에서는 결국 별포수別砲手를 파견하여 호랑이를 쏘아 죽였지만, 그 기이한 행태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선산에서 발생한 호랑이 이야기가 노상추의 귀에 닿았을 때는 모든 선산 사람들 역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호랑이를 영물로 인식하는 기본 생각에 대형 호환이 만든 온갖 추측이 더해지면서, 새끼를 죽인 어미 호랑이의 역습으로 받아들여졌을 터였다.

그러나 이러한 호랑이의 역습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호환 관련 기록만 700여 건이 넘는다. 호환이 얼마나 잦았는지는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노상추가 기록을 남겼던 이 시기, 즉 영조 시기에만 호환 관련 기록이 100여 건에 이른다. 유난히 영조 시기에 호환이 많았다는 의미이다. 이는 호랑이 개체수의 증가에 따른 결과인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조선 초부터 호환이 문제가 되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이후 들어 온 조총은 호환에 대한 훌륭한 대비책이 되었다. 양난 이후 들어온 조총은 정확성이나 파괴력에 있어서 호랑이를 잡기에 최선이었다. 조선은 호환으로 인해 호랑이를 잡아서 신고하면 병조에서 포상을 해 주는 정책을 썼다. 그리고 비록 포상을 받지 않더라도 호랑이 가죽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 포수들의 수입은 높았다. 당연히 총 든 호랑이 사냥꾼들이 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늘어난 포수들이 포상을 받기 위해 허위 사실을 기재하는 경우가 늘었고, 조정은 결국 이 제도를 혁파했다. 포수들 역시 호랑이 가죽으로 수입을 유지했으니, 처음에는 큰 문제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이미 포수의 수는 증가한 상태였다. 포상제도가 없어지면서 많은 포수들은 기존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호랑이를 잡아야 했고, 호랑이 가죽 공급 역시 증가했다. 이는 호랑이 가죽 수요 하락을 불러왔고, 이로 인해 영조 때가 되면 호랑이 사냥꾼들이 자신의 총까지 팔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당연히 호랑이는 늘었고, 이는 호환의 횟수뿐만 아니라 규모도 증가시키는 이유가 되었다. 영조 10년에는 여름에서 가을까지만 140명, 그 이듬해에도 40여 명이 호환으로 사망했다. 호랑이 사냥꾼들로 하여금 총을 놓게 한 작은 정책 변화의 결과치고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어떠한 정책도 그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정책을 만들 때나 혁파할 때, 그것이 미치는 영향의 정도를 정밀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대형 호환은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덮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