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허전한 마음과 헤어질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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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인지할 때, 보통 허전한 기분이 뒤따른다. 이를테면 친분 있는 이의 떠난 자리를 느낀다거나, 거울 앞에서 하루가 다르게 넓어지는 이마를 볼 때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꾸 뭐가 사라진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마저 사라져서, 뭐가 사라졌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언제나 그런 건 아니다.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인지할 때, 어떤 경우에는 감격스럽다. 얼마 전 뉴스민 10주년 행사를 했다. 10주년 행사 때 구미 아사히글라스 해고노동자를 초청해 대담을 진행했다. 감격스러운 것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해고자들이 쌓아온 것이다.

딱 7년 전, 2015년 7월 1일에 아사히글라스 하청노동자들이 길바닥에 내몰렸다. 노조 설립 신고 후 해고까지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하청업체 노동자 178명 중 138명이 노조에 가입했다. 찍소리 못하던 하청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 구호도 외쳐보고 투쟁가도 불렀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공단을 이곳저곳 전전하다가 얼떨결에 노조에 가입하고 해고 당한 한 노동자는, 그때 공장 안에서 한 번 불러본 투쟁가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순간의 해방감은 달콤했지만, 뒤이어진 해고는 썼다. 감당하지 못한 해고자들은 떠났고, 22명이 남았다. 어딜 가도 비정규직이던 한 해고자는 딱 한 번, 이번에는 이겨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7년의 길바닥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해고자들의 투쟁은 단순히 공장으로 돌아가려는 복직 투쟁이라고만 할 수 없다. 구미공단 첫 비정규직 노조 결성 이후, 전국 최초 제조업계 불법파견 징역형 판결을 이끌어낸 해고자들의 투쟁은 그 자체로 기록적인 일이지만, 해고자들이 쌓은 빛나는 것들도 같이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아사히글라스 투쟁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지난 7년 대구·경북에, 그리고 지역을 넘어서 전국의 아픈 투쟁 현장에 아사히글라스 해고자들이 있었다. 같은 처지의 비정규직 투쟁 현장뿐 아니라, 성주 주민들의 통곡 속에 사드 발사대가 배치되는 국가폭력의 현장에도 아사히글라스 해고자들이 함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故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와 해고자가 만났을 때다.

실내에서 학생 몇이 참석한 간담회 자리, 해고자 차헌호 씨는 김미숙 씨 옆에서 소개말을 하다가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각자 외롭게 싸우고 있는데 어머니가 함께 해주셨다’고 한 뒤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 김미숙 씨는 이렇게 답했다. “저도 같이 함께해주신 분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저 혼자서는 정말 혼자 속앓이하고 죽지 못해 사는 건데, 이 분들이 계셔서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나누면 커지는 촛불처럼 해고자들이 쌓은 빛나는 것들이 도처에 있다. 뉴스민 10주년 행사에 참석한 해고자들은 행사가 끝난 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 현장으로 향했다.

이번 주는 아사히글라스 차례다. 이번 주말, 9일 구미 아사히글라스 정문 앞에서 투쟁 7년 맞이 집회가 열린다. 노조 지회장 한 명 빼고 복직시켜주겠다는 사측의 제안을 뿌리치고 다 같이 이기겠다는 해고자들의 투쟁이 이룩할 것은 무엇일까. 이번 주말은 아사히글라스 해고자들의 기념비적 투쟁에 투자하고 싶다. 그러면 당분간 허전한 마음과도 이별할 수 있겠다.

“햇수로 8년째 투쟁하는데, 이만하면 충분히 했으니 그만하라는 말도 합니다. 회사와 합의하고 정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더러 그만하라는지 희한한 일이죠. (회사의) 합의 제안도 굉장히 힘들었지만 거부했어요. 아사히가 사과해야 합니다. 반드시 사과받을 거고 다시는 이런 일 못하도록 할 겁니다.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지만, 22명 온전히 이길 겁니다.”(6월 24일 뉴스민 10주년 행사장에서 차헌호 씨의 마지막 발언)

▲아사히글라스 부당해고 투쟁 6년, 공장으로 함께 향하는 해고자와 연대자들. (사진=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