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조선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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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5년 음력 7월 9일, 조보를 받아 든 노상추는 희한한 사건을 목격했다. 조보 내용은 승지 이한풍李漢豊과 음직(가문이나 문중의 힘을 빌어 대과 합격 없이 벼슬에 나간 직책)으로 관리가 된 조학량趙學良이 공초를 받고 풀려났다는 기사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공초를 받은 이유로, 이한풍 집안의 한 여종 때문이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해, 여종이 되기를 스스로 원한 사대부가 여인 때문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약 9개월 전인 그 이전 해 음력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음력 10월이면 양력으로 11월쯤 되니, 막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이 추운 날 한 여인이 서문 밖에 살고있는 승지 이한풍의 집을 찾아. 그녀 스스로 여종이 되기를 청했다. 당시 상황과 행색으로 보아 일부러 이한풍의 집을 찾아온 게 아니라, 여종을 부릴만한 집을 찾아 대충 문을 두드린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문을 두드려서 천한 신분인 여종이 되겠다는 여인을 이한풍 역시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단원풍소도첩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자신을 여종으로 팔려고 하는지 캐 물었지만,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아, 그녀의 신분도 확인할 수 없었다. 미심쩍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렇다고 겨울로 접어드는 추운 날 아무것도 없는 여인을 길거리로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갈 곳이 마땅치 않아 보여 그녀를 집에 두고 일은 시키게는 했지만, 그녀에게 돈을 주고 노비가 되게 하는 일은 좀 미루어 두기로 했다. 사람 좋은 이한평으로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노비가 되길 원했던 이 여인의 정체는 탄로 났다. 당시 이한풍의 며느리는 음관 조학량의 딸이었는데, 그녀가 친정에 갈 일이 생겼다. 이한풍은 며느리 친정길에 비교적 사리가 밝고 일도 잘했던 그 여인을 함께 보냈다. 바깥출입을 하도록 한 이한풍의 배려였다. 그런데 이한풍의 며느리가 친정에 가보니, 마침 아버지 조학량의 친척 집에 잔치가 있었다. 조씨 집안에서는 이를 돕기 위해 집안 여종들 대부분을 보냈는데, 그도 손이 모자랐던지 이한풍의 며느리를 수행한 그 여인도 딸려 보냈다.

사단은 여기에서 일어났다. 잔칫집이다 보니 많은 여성들이 손을 보태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모였는데, 거기에서 노비가 되려 했던 여인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문제의 여인을 ‘이씨 집안 부인’이라며 아는 척을 했다. 이씨 집안 부인이라고 알아본 그 여자는 그가 지칭한 이씨 집안 외삼촌의 종이었으니, 그녀를 몰라볼 리 만무했다. 게다가 이씨 집안에서 부인이 사라져 난리가 난 상황도 알고 있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사대부인 이복초李復初의 부인이었다.

그녀를 알아본 여종은 지체없이 이를 집안에 알렸고, 사라진 딸의 행방을 찾고 있던 여인의 친가에서 먼저 달려왔다. 그녀는 사대부인 민백현閔百賢의 딸이었다. 민백현은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우선 딸을 데리고 갔다. 멀쩡하게 시집간 딸이 사라졌다가 남의 집 여종으로 발견되었으니, 기가 막힐 일이기는 했다. 문제는 그 여인의 남편 이복초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복초는 아연실색했고, 결국 예조에 이혼 소장을 올렸다. 더 이상 결혼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확실히 했고, 그녀의 행동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여인의 친가인 민씨 집안은 이야기가 달랐다. 가출해서 여종이 된 딸은 두고두고 집안의 망신거리였다. 어떻게든 명예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한풍과 조학량을 고발했다. 길을 잃은 여인을 억지로 잡아 여종을 삼으려 했다는 게 이유였다. 사대부의 고발이다 보니 이한풍과 조학량은 졸지에 잡혀가서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억울해도 이렇게 억울할 데가 없었다. 기록대로라면 이한풍은 갈 곳 없는 여인을 받아준 죄 밖에 없었고, 조학량은 자기 딸이 친정 올 때 그녀를 데리고 온 죄밖에 없었다.

이 이상한 사건은 예조판서를 거쳐 왕에게까지 올라갔다. 정조는 현명한 왕이었다. 그는 온갖 형사 사건 관련 보고를 늘 직접 받았고, 그러한 사건을 심리하는데 능했다. 그는 사족 부녀가 도망쳐서 자신을 여종으로 팔아 남에게 부림을 당하는 일을 달가워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면서, 이는 필시 곡절이 있으리라 추정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복초는 자신의 부인이 왜 도망쳤는지 끝내 밝히지 않았다. 사대부가 여인을 직접 조사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 때문에 직접 그 여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으니, 결국 원인은 오리무중이 되었다. 다행히 이한풍과 조학량은 그저 갈 곳 없는 여인을 데리고 있었다는 점이 참작되어 방면되었다. 결국 이 사건의 처벌은 이복초의 아비인 이유릉李惟稜에게 내려졌다.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현대 관점에서 보아도 이 사건은 이상하기 이를 데 없다. 철저한 신분 사회인 조선에서 사대부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가장 낮은 신분인 노비를 자청했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있다. 조선시대 양인들의 경우 국가나 지방관의 수탈이 심하면, 스스로 명망 있는 사대부 집이나 서원과 같은 공적 기관에 자신을 노비로 삼아달라 청했다. 국가나 지방관의 수탈보다 신분을 포기하고 명망 있는 주인에게 기대는 게 더 실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횡포가 심하면, 양인들은 차라리 천한 신분인 노비를 선택했다.

이씨 부인의 가출에도 이러한 연유들이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대부가 여성으로서 사는 삶보다 여종으로 사는 삶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정도면, 일부 여성들에게는 신분마저 그녀들을 옥죄는 틀이 되었을 수 있다. 사대부가의 남성이 아닌 한, 비록 사대부가 사람이라도 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많았다는 의미이다. 물론 부부간의 내밀한 이유일 수도 있고, 그 여인 개인의 이유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아는 조선에서 여성은 ‘신분을 막론하고’ 남성에 의해 억압받는 삶을 살았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