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나운규 프로덕숀’&‘하늘을 우러러’, 독립운동사와 만난 로컬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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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21세기 독립영화에서 희귀해진 근현대사 배경 작업

8월 15일 광복절이 지났다.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에는 크게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비판하는 측에서는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에만 매몰되었다는 평가가 나왔고, 긍정하는 쪽에서는 보수정부 때마다 논란이 되었던 ‘건국절’ 논란이 등장하지 않고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는 내용을 평가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행간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사는 부정하는 게 아니냐는 논란은 남았다.

해방 후 77년이 지났고 이제 일제강점기를 체험한 세대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여전히 한국 근현대사의 유산들이 강력한 국민정서로 남아 있지만 실제 경험에 입각하기보단 이념적 상징에 가깝다고 봐야 할 테다. 그런 가운데 과거사의 상흔보다는 일상적으로는 보편적 ‘민주주의’ 체제를 공유하는 가치 동맹이란 표현이 근래 신(新)냉전 상황 구도에서 급속도로 확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혼재된 가치관의 충돌 속에서 정작 소중한 역사의 기억들은 사라져가는 중이다.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의 검열에 맞서던 초기 독립영화(특히 다큐멘터리 분야)는 상대적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에 결합하면서 근현대사 발굴과 복원 과제와 일정한 연결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편이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사회운동과 결합된 ‘영화운동’ 흐름은 소수가 되었고, 주류 상업영화를 제외한 다양한 결의 영화작업이 뭉뚱그려져 ‘독립영화’로 불리게 된 상태다. 거대담론이나 정치사회적 쟁점이 약체화된 자리에 ‘개인’이 자리를 잡으면서 특히 2030세대가 중심이 된 지역의 독립영화판에선 특정한 기준의 제작의뢰 없이는 근현대사 관련 주제를 작업하는 경우는 지극히 희귀한 사례가 되어간다. 오히려 상업영화판에서 잊을 만하면 그 스펙터클과 홍보의 용이함 때문에 해당 시기와 소재가 호출되는 것과는 퍽 대조적인 상황이다.

독립영화의 주요 창작세대가 과거 역사와는 직접적 체감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연령대라는 점, 역사물의 고증 등에 들어가야 할 비용과 자원 때문에 도전하는데 애로가 꽃피는 점 등 현재 상황은 자연스러운 결과이지 가치판단으로 품평할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하지만 다양한 주변의 소재를 발굴하고 소화해내는 가능성이 제약된다는 측면에선 분명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가뭄에 콩 나듯 의외의 시도가 종종 발견된다. 지역에서 활발히 제작과 연출, 연기 등 다방면에 활동 중인 윤진 감독의 일련의 작업은 그 보기 드문 사례다.

2_춘사 나운규를 팩션으로 재현하다, <나운규 프로덕숀>

한국영화의 초창기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춘사 나운규를 거론하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동시대의 찰리 채플린처럼 감독, 각본, 주연 등 대부분의 역할을 혼자서 감당하는 완전 작가 포지션을 그의 영화경력 대부분 동안 유지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의 대표작 <아리랑>은 1926년 첫 편 이후로 총 3편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종종 역사 기록에서 볼 수 있는 <아리랑>의 이미지, 나운규가 낫을 든 광기어린 표정연기는 3편의 장면이라고 한다. 또한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인 노래 ‘아리랑’은 현대에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바로 그 곡으로 나운규가 직접 창작한 것이기도 하다.

▲[사진=나운규 프로덕션 스틸이미지]

하지만 한국영화사의 초창기를 수놓았던 나운규의 영화들은 일제 말부터 해방전후의 혼란기 중 유실되어 현재 그의 영화는 오직 몇 장의 스틸사진 이미지와 단편적 기록으로만 확인될 수 있다. (물론 다른 감독의 작업들 또한 제대로 보전된 게 드물다) <아리랑> 연작 외에도 <벙어리 삼룡>, <임자 없는 나룻배>, <오몽녀> 등 당대의 인기작들을 남겼다. 또한 그는 본격적으로 영화에 뛰어들기 전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에 가입 후 홍범도 장군 휘하에서 투쟁에 나섰다 체포돼 혹독한 고문과 2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의 영화는 내내 검열에 시달렸고 그럼에도 그는 사회적 발언을 그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행보는 한국독립영화의 본격적인 형성과정과도 반세기를 뛰어넘어 통하는 바가 많다. 예술창작으로서의 영화에 집중하기엔 당대 현실은 너무나 엄혹했다. 물론 생계와 흥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던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독립군 시절의 올곧은 태도를 놓지 않으려던 춘사 나운규의 자세(사생활 논란은 분명히 있지만)는 1980년대 이후 활성화된 독립영화의 고민과 퍽 닮아 있다. 일종의 ‘지사’적 태도라 통칭해도 되겠다.

윤진 감독은 근 한 세기 전 춘사의 기억을 반추하며 헌정 성격의 단편영화를 기획한다. 국가보훈처 등의 지원을 그러모아 소규모 팀을 꾸려 6분 남짓한 초단편 소품으로 춘사에게 경의를 표하는 색채가 짙은 작업이다. 가상의 역사를 재연하려는 감독의 시도는 1929년으로 향한다.

▲[사진=나운규 프로덕션 스틸이미지]

어두컴컴한 밤, 예스러운 복장을 한 남자가 산길을 헤매며 필사적으로 도주하는 중이다. 그런 남자의 뒤를 (복장은 순사라기보단 일본군이지만) 소총을 든 순사가 뒤쫓는다. 남자는 인가에 숨었다 뒷문으로 도피 길을 거듭한다. 추격전 중 논두렁에서 총격을 당해 또 다른 인가 광에 숨은 남자가 필사적으로 챙겨온 것은 바로 <아리랑>의 필름이 든 둥근 통이다. 감독은 실제 나운규의 행적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상징적인 연출로 춘사의 독립군 경력과 영화 운동의 기록을 절묘하게 합일시켜낸다.

감독은 흔히 지역에서 ‘독립영화’를 한다고 주변에 이야기하면 ‘독립군영화’를 만드느냐는 질문을 되받던 경험을 승화해 아예 제대로 ‘독립’군’영화’를 한번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으로 본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 <아리랑>은 1926년에, 나운규 프로덕션은 1927년에 만들어졌지만 일제의 검열과 가장 격하게 대립하고 내외적 문제로 프로덕션이 해체한 건 1929년이기에, 상징적인 의미로 1929년을 선택한 것이리라.

또한 이 간결한 소품의 제작방식 또한 감독이 연출과 주연은 물론 각본과 편집 등 전성기의 춘사를 방불케 하는 형태로 진행해 오마주의 의미를 진하게 더했다. (엔딩 컷의 장면 전환은 탄성을 지를 정도로 뛰어난 반전이 압권이다) 간단한 아이디어와 소규모 스태프만으로도 이렇게 주제의식이 명확한 단편을 만들어낸다는 건 주목받아 마땅한 사례다.

3_잊혀가는 향토사 기록 프로젝트, <하늘을 우러러>

“우리 동네 뒤편에는 담뱃갑과 잡초에 묻힌 탑이 있다…”

▲[사진=’하늘을 우러러’ 스틸 이미지]

미니 다큐멘터리 <하늘을 우러러>는 위와 같은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된다. 감독 형제는 동네에서 그냥 지나치곤 하던 초라하게 잊혀가던 지역 사적에 대해 어느 날 문득 관심을 갖게 된다. 기념탑은 나름 항일독립투쟁으로 공식 인정된 흔치 않은 의의를 가진 비밀결사 ‘태극단’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결사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형제는 자료를 조사하고 증언을 청취하기 시작한다. 광복회 대구지부를 찾고 지역에서 독립운동사에 조예가 있는 교수를 방문하고 태극단이 활동했던 학교의 후신이 되는 학교 총동창회에 관련 정보를 청한다. 그렇게 해서 감독들이 확인하게 된 사실은 사뭇 놀라운 내용이다.

태극단은 일본제국이 패망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1942년 5월 결성되었다. 대구 상업학교 재학생 26명이 학내에서 일본인 학생에 비해 의도적인 성적 차별 등 부당 대우와 강제 군사훈련 등에 불만이 누적되던 중 비밀결사를 조직해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조직의 이름이다. 결성 1년 후인 1943년 5월에 그만 내부 변절자로 인해 기밀이 누설되어 조직원 전원이 체포된다. 일제 말인 당시 국내에서는 조직화한 항일투쟁이란 거의 찾아보기도 힘들던 시절이다. 그런 상징성은 물론 체계적인 조직을 결성해 무장투쟁을 계획하던 규모나 의의보다는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 투쟁인 셈이다. 실제 투쟁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사전 모의 단계에서 탄압으로 해산되었지만 1920년대 광주학생의거 이후 그에 비견되는 학생조직 독립운동의 의미는 작지 않다.

▲[사진=’하늘을 우러러’ 스틸 이미지]

감독 일행은 지역 내에서 자료 취합 후 단 2명 남은 생존자 중 유일하게 증언이 가능한 정환진 의사를 찾아 대전으로 향한다. 1927년생인 의사는 만 15세에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른 일과 일제의 만행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옥사한 동료들에 대한 추억들을 회상하고 당대 시대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차례로 흘러나온다. 감독들은 마치 증손자들처럼 이야기를 경청하며 생생한 근현대사 인터뷰를 카메라에 담는다.

본격적인 역사고증 작업이라 하기엔 워낙에 작업의 출발부터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니었기도 하고, 심층 탐사보도 기록영화로 가기엔 지원을 받고 시작한 것도 아닌지라 완성도 면에선 한계가 명확한 작업이다. 별다른 자원이 투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감독 형제의 시간과 자금을 쪼개어 작업된 사정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본 작업은 의사의 증언과 태극단 조직의 숨은 역사 소개, 그리고 지역 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 조명의 필요성으로 간략히 마무리된다. 하지만 향토사 연구 측면만 보더라도 이런 형태의 영상 기록은 그 작업 자체로 의미가 있다. 특히나 더 늦기 전에 극소수 생존자의 증언을 지역 차원에서 기록할 수 있었다는 건 특별히 계획된 게 아니라 순전히 감독 형제의 동네 관찰 덕분인 셈이니 그 가치는 결코 폄하될 수 없다.

▲[사진=’하늘을 우러러’ 스틸 이미지]

4_윤진 감독의 작업을 통해 생각나는 것들

지역의 영화·영상 창작자들에게 사회운동 활동가를 반드시 겸직해야 할 당위적 의무는 없다. 하지만 지역사회 내에서 이런 기록 작업과 영화 창작이 별개로 유리되는 건 자원 연계 측면에서 바람직한 일도 아닐 테다. 뜻과 취지를 살릴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기록과 의제 작업은 어느 지역이건 절실한 과제일 것이다. 기왕이면 서로 교류하고 협업하며 가치를 극대화할 필요성은 충분하다. 윤진 감독의 독립운동 관련 단편 작업들은 그저 일회성 시도로 그치기에는 상당한 잠재력을 숨겨두고 있다.

근래 독립영화의 젊은 창작자들이 자신과 주위의 소재를 지극히 섬세한 시선과 터치로 다루는 스타일이 경향으로 굳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다. 그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다양한 소재와 표현방식을 (유행에 편승하는 게 아니라) 실증적 관찰과 확고한 주관에 따라 보다 다채롭게 다뤄봤으면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이 남는다. 그런 가운데 소개한 작품들과 같은 뜻밖의 의외를 발견하는 체험은 늘 흥미롭고 고무적인 일이다.

마침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찾았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대구는 서울(경성) 다음으로 극장이 많고 영화제작이 활발하던 도시이기도 했다. 나운규의 대표작 상당수(1932년 <임자 없는 나룻배>, 1933년 <종로> 등)가 대구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된 것들이었다. 서울에서만 당대의 흥행영화가 만들어지던 시절이 아니었던 것이다. (출처=<대구예술 시간여행> 영화편)

하지만 일본제국주의는 당시 식민지 조선민중에게 신문명의 이기인 동시에 문화적 영향력이 크던 영화매체를 통제하려 지속적으로 시도한다. 2차 대전 중 결국 영화 제작회사들을 통폐합해 관변어용영화만 양산하는 체제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비슷한 통제방식은 해방 이후 군사독재정권들도 거듭 애용했다. 초창기 독립영화는 그런 강요된 질서에 저항하는 대항영화운동과 떼려야 떼어낼 수 없는 출발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지역독립영화는 과연 무엇에 대항하거나 혹은 대안이 되고자 하는가? 대답은 다양하게 나올 테지만 흥미로운 과정이 연쇄 작용할 것으로 기대되는 질문이다. 그리고 ‘독립영화’는 ‘독립군영화’ 아니냐는 대중의 오해는 그저 틀리기만 한 것일까? 어쩌면 근본을 건드리는 의문 아닐까? 잡상은 계속된다.

<작품정보>

나운규 프로덕숀 Naungyu Production
2018|한국|드라마|06‘16“
출연 윤진(나운규, 순사), 전상진(산비탈 순사). 장병기(논두렁 순사), 문경영, 권민령
감독/PD/각본/편집 윤진
촬영/D.I. 전상진
분장/스크립 문경영
동시녹음 권민령
음악 이정숙 <낙화유수>

2018 8회 충무로 단편, 독립영화제 비경쟁부문-우수작품상
2018 19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경쟁

하늘을 우러러 Look up at the sky
2019|한국|다큐멘터리|17‘33“
감독 윤대흥, 윤진
촬영 최창환
PD 윤진
현장녹음 김주영
항공촬영 박재현
편집 전상진, 윤진, 윤대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