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위세만큼 커지는 이해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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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8년 음력 7월에 부임한 신임 안동부사 심액沈詻(1571~1654)에 대한 소문은 나쁘지 않았다. 천성이 너그러워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소식은 지방관 하나의 죽고 사는 안동부민들 입장에서 참으로 반가웠다. 실제 안동부사가 취임한 이후 그의 정책을 경험했던 백성들 역시 세금 운영이 그리 빡빡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 정도만 해도 백성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노력했던 지방관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임 초 그의 행동은 당시 예안현(안동시 예안면 일대)에 살았던 김령金坽(1577~1641)의 눈에 청렴성과 조심성이 없는 사람으로 비쳤다. 물론 당시 지방관의 청렴성이란 게 관행적인 것도 많아 지금에 비해 훨씬 너그러웠지만, 그러한 기준에도 불구하고 김령이 보기에 심액은 청렴하지 못한 지방관의 행태를 그대로 밟았다. 특히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청렴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가족이 연루될 때 더 커지기 마련이다.

본관이 청송이었던 심액은 당색으로도 영남 남인인 탓에, 청송을 기반으로 지역에 연고가 많았다. 당시 기록이 없어 그가 당시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김령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안동부사 부임이 출신지에서 가까웠다고 했다. 청송이 그의 출신지였을 가능성이 높은 이유이다. 실제 그의 두 딸이 예안현에 속한 온계 고을에 시집온 것을 보면 이러한 사실은 좀 더 분명해 보인다.

그의 첫째 딸은 온계에 사는 안씨 집안에, 그리고 둘째 딸 역시 온계에 사는 이암에게 시집을 보내, 그는 예안 사람들과 사돈을 맺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첫째 아들은 원래 의성에서 거주하다가 청송으로 옮겼는데, 그 장인은 안동 임하의 권복길이었다. 예안과 안동 등지에 사돈을 맺고 있었다. 당시 큰 아들은 청송에 살았고, 둘째 아들은 거처가 없이 이리저리 떠돌았지만 대체로 안동부 주위 고을이었다.

그랬던 그가 안동부사로 부임하면서 구설에 올랐던 이유는 그의 며느리 때문이었다. 기록만 가지고는 정확하게 어느 아들의 며느리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아마 심액을 한양에서 수발했던 며느리로 보인다. 그는 그 며느리를 데리고 부임했고, 안동부사는 그 며느리를 딸들이 사는 온계로 보냈다. 며느리 혼자 있다 보니 딸들이 있는 고을에 보내는 게 마음이 편했겠지만, 문제는 며느리가 온계 마을에 올 때 그녀를 따라간 짐바리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였다는 데 있었다.

더 문제는 그녀가 온계에 도착하자마자 온계 마을 사람들 모두가 대소를 막론하고 안동부사의 며느리 집에 면포를 보내 주었다. 빈부에 따라 차등을 두고 일정 정도 목표액을 채우는 방식으로 거두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러한 행태가 자발적일 수는 없었다. 물론 백성들 스스로 결정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마저도 안동부사의 위세를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러한 면포 각출이 안동부사의 계획이었음은 곧 드러났다.

안동부사는 고을 사람들이 가져다준 면포를 잘 기록해 두라고 했다. 가을이 되면 면포에 해당하는 만큼 곡식으로 돌려주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이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온계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면포를 모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지역에 내려오는 안동부사 며느리에게 필요한 경비를 급하게 유통해 주기 위해서였을 터였다. 물론 지금 이 시점에 빌렸다가 가을에 안동부사가 사비로 돌려주면야 문제 될 건 없지만, 그러나 가을에 곡식을 돌려준다는 말은 당시 누구나 짐작 가능한 초보적 수준의 추론을 가능케 했다. 백성들에게 거둔 면포에 대한 대가 역시 가을 세곡을 거둔 데에서 돌려주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행태가 온계에 사는 며느리 한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큰아들의 장인인 권복길은 임하 근처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신임 안동부사가 부임한 이후 권복길의 집에는 쌀과 포목, 반찬거리를 대어 주는 행렬이 길에 잇닿을 정도였다. 권복길은 안동부사의 사돈이라는 이유만으로 백성들이 가져다주는 쌀과 포목, 반찬을 받아 챙겼다. 안동부사에게 늘 가깝게 청탁할 수 있는 위력은 당시로서는 정말 컸다.

이러한 와중에 청송에 사는 큰아들은 가옥 수리에 들어가는 모든 도구와 비용을 안동부에서 받아 챙겼다. 당시 첫째 아들의 집에는 처와 첩, 자식, 그리고 노비까지 합하면 대략 60~70여 명쯤 되었다. 이처럼 대식구가 사는 집을 수리하는 데 관아에서 비용을 댔으니, 그 비용이야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만저만 큰 비용이 아니었을 터였다. 이쯤 되니 김령은 안동과 인근 고을들의 창고가 부사 가족들 챙기느라 휑하니, 고갈되어 남는 게 없을 정도라고 기록했다.

지금이야 공무를 보는 사람이 법인 카드로 업무에 관련되지 않는 밥만 먹어도 문제가 되는 세상이지만, 조선 시대는 일정 정도 관행이 허락되었다. 뇌물도 일정 정도는 인정人情의 범위에 속했고, 공무와 개인 업무가 지금처럼 철저하게 구분되지도 않았다. 지방 수령의 가족이면 지방 수령처럼 대해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본래 수령은 출신지에 발령을 내지 않는 법이었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출신지와 가까운 고을에도 발령을 내지 않았다. 게다가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까지도 규정에 따르도록 했고, 이를 엄하게 관리했다.

그러나 국가의 법이 그렇다고 해도,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고, 안동부사 심액은 부임 초기 실제 그랬다. 법이 정한 테두리에서 보면 안동부 안에만 가족이 살지 않으면 되지만, 이해충돌은 지역 경계만큼 선을 명확하게 긋지 않는 법이다. 자기 스스로 더욱 명확한 선을 긋지 않으면, 인정과 뇌물의 간격은 가까워질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힘들어지는 이들은 힘없는 백성들이다. 왜 우리 사회가 권력자들의 이해충돌을 방지하는 데 엄격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명확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