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송이버섯에 매긴 세금

12:49
Voiced by Amazon Polly

바야흐로 송이버섯의 철이다. 11호 태풍 힌남노의 피해 여파로 인해 쉬 그 기대를 표출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충분한 수분이 뿌려지고 땅의 온도가 내려가면서 송이버섯의 작황이 좋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를 주업으로 하는 농민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워낙 고가라 작황이라도 좋아야 한 번쯤 식탁에 송이버섯을 올려볼 엄두라도 내는 서민들 마음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390년 전인 1632년, 음력으로 오늘(기사 게재일인 9월 7일이 음력 8월 12일), 예안고을(현 안동시 예안면 일대)에 사는 김령金坽은 오랜만에 사촌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여러 이야기가 오갔지만, 이날 김령은 송이버섯 관련 대화를 기록으로 남겼다. 김령이 스스로 송이버섯을 예안 고을 토산품이라고 말할 정도로(《계암일록》, 1620년 9월 4일 기록) 예안에서도 꽤 많이 생산되었고, 당시에 마침 추석을 앞두고 송이버섯 채취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송이버섯 채취가 시작되자, 이를 틈타 예안현감의 횡포도 함께 시작되었다. 송이버섯 채취에 대해서도 세금을 부과하기로 한 건데, 문제는 송이 한 뿌리에 보통 8~9배를 받았고, 질 낮은 송이도 5~6배는 받았다고 했다. 원문에서도 무엇과 비교해서 5~9배를 받은 것인지 그 대상이 나오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기존에 상식적으로 받았던 금액의 몇 배를 더 거둔 것으로 보인다. 김령은 그 이전에 탐관오리로 규정했던 김진도 3~4배 정도만 받았다면서, 당시 예안현감의 횡포를 부각시켰다. 그러나 김령이 탄식을 금치 못한 이유는 예안현감이 세금을 많이 부과했던 것만큼 더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조선의 세금은 이른바 조용조租庸調로 나눌 수 있다. 조租는 토지 경작물에 대해 내는 세금으로, 경작량에 따라 국가에서 수취하는 기본 세금이었다. 용庸은 노동력을 세로 간주한 것으로, 국가나 지방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백성들로부터 제공받기 위함이었다. 토목공사나 건축, 축성 등이 필요할 때 국가는 백성들의 노동력을 제공받을 권한을 가졌다. 그리고 마지막 조調는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 특산물이나 생산물을 현물로 거두는 것으로, 흔히 공물이나 진상물 등이 여기에 속했다.

그런데 송이버섯을 채취하는 데 대해 별도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이 세 분야의 세제에 어디에 속한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물론 송이버섯을 공물이나 진상물로 부과받은 지역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송이를 거두어 내야 했지만, 백성들이 송이 채취를 하는 데 대해 세금을 부과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농사를 통해 재배한 전세의 종류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그야말로 예안 현감 자기 마음대로 백성들에게 세금의 명목을 붙여서 송이 한 뿌리당 일정 정도의 세금을 받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법에 근거하지 않은 불법적인 세금 운영이었다.

게다가 여기에는 더 중요한 원칙도 있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조선은 유학을 기반으로 건립된 국가다. 국가 운영의 목표마저 왕도정치를 통해 백성들이 도덕적으로 완성된 삶을 사는 데 둘 정도였다. 국가 전체가 유학 이념에 충실해야 했고, 경전의 말씀 역시 거역할 수 없는 원칙이었다. 이러한 그들에게 유학의 핵심 경전 가운데 하나인 《맹자》에서는 “문왕이 소유한 산 정원이 70리나 되었지만 꼴 베고 나무하는 이들이 들어갈 수 있었으며, 꿩이나 토끼 잡는 이들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양혜왕상梁惠王上〉”라는 말이나 “(문왕이 기岐라는 나라를 다스릴 때, 고기를 잡을 수 있는)연못이나 흐르는 물에 설치한 어량에 (일반 백성들이)출입하는 것을 금하는 경우가 없었다〈양혜왕하梁惠王下〉”라는 말은 산림자원이나 강‧연못의 어족 자원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군주가 전세나 공물 등의 세금을 받되, 산이나 강‧연못 등에서 나는 자원을 독점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군주가 독점하지 않으니, 당연히 특정 계층이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라도 이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 “산림山林‧천택川澤은 백성들과 더불어 그 이익을 함께 한다”는 원칙으로, 이 원칙에 따라 산림자원의 채취와 이용에 대해서는 세금을 부과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는 적어도 백성들이 땔나무를 구하거나 임산물을 채취하는 데 대해서는 특별한 제한을 가하지 않았던 이유이며, 동시에 국가는 절대 이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가졌다. 따라서 특정한 산림자원이 공물로 부여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백성들이 그것을 이용하고 활용하는 데 제한이 없는 게 원칙이었다.

송이버섯에 세금을 부과하고 있는 예안현감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맹자》는 주자학자들이 기본적인 필독서였고, 〈양혜왕〉 상과 하는 왕도정치의 기본을 보여주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과거시험을 통해 예안현감이 되었다면, 이러한 기본 이념을 모를 수도 없었고, 몰라서도 안 되었다. 김령이 보기에 예안현감은 단순히 국가 세법을 어긴 정도가 아니라, 유학의 기본 이념을 어긴 것이었다. 논이나 밭이야 개인 재산의 영역이라 하더라도, 국가는 최소한 산림이나 천택川澤은 공적재화로 인정함으로써, 이를 공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21세기 초반, 한국 사회는 토지공개념의 제도화를 위한 논의가 뜨거웠지만, 사유재산권에 기초한 민주주의 제도는 기본적인 개념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물론 사유재산권 역시 개인의 인권과 더불어 개인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중요한 권리이며, 이를 훼손시킬 수 있는 어떠한 논의도 반드시 재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산림‧천택을 비롯한 토지처럼 지구가 생긴 이래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더 이상 추가 생산이 불가능한 재화에 대해 우리 모두가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는 고민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히 송이버섯에 세금을 붙이는 문제를 넘어, 인류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반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