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책으로 담아낸 지방 방송작가 20년, 노조 활동가 5년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되어 가는 중> 저자, 권지현 언론노조 방송작가유니온 영남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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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방송작가를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하는 최초의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은 2020년 6월 MBC가 ‘뉴스투데이’ 방송작가 2명을 해고한 것이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이 프리랜서 게약을 맺고 MBC의 지휘와 감독 아래 근무한 점에 비춰 근로자로 봐야 한다는 중앙노동위원회의 판단을 인정해준 것이다. 장장 2년에 걸친 싸움이었다.

MBC는 ‘부당해고’ 판결을 받고 복직한 방송작가 2명을 올해 신설한 ‘방송지원직’으로 채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급여, 승급, 인사 등 규정이 기존 일반직에 비해 열악한 직군이다. 여전히 과제는 남았지만 업계에선 방송국 비정규직을 대표해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노동권을 인정받은 괄목할 성과라고 평가한다.

여러 변화 뒤엔 노동조합이 있다. 방송작가유니온은 2017년 11월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로 정식 출범했고, 2018년 2월에는 대구, 포항 등의 방송작가를 주축으로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영남지회가 출범했다. 지역지회로는 첫 출범이었다. 권지현 한국교통방송 대구본부 방송작가는 영남지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지난 6월 책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입니다’를 출간한 권지현 작가를 한국교통방송 대구본부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권지현 작가는 지난 6월 에세이를 담은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입니다>를 출간했다. 지방 방송작가로서, 노동조합 활동가로 일하며 느낀 노동과 연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지난 6일 한국교통방송 대구본부 인근 카페에서 권 작가를 만나 책 출간 배경부터 20년 차 방송작가의 삶, 노동조합의 지난 5년 성과와 과제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Q. 지금은 어떤 방송을 맡고 있는가?

시사 프로그램을 오래 하다가, 6개월 전부터는 트로트 예능 프로그램을 맡았다. K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지역의 사생활’도 맡고 있다. 막창이 우리 식탁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 지역의 기술 장인 이야기 등을 취재하고 썼다.

스물셋에 방송작가를 시작해 결혼과 출산을 거친 4년의 경력단절 기간을 제외하고 20년 넘게 일을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막내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허리를 넘어 어깨 정도의 위치에 올라왔다.

Q. 노동, 연대 같은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소재가 매우 편안하게 써졌다.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코로나19로 외출이 어렵던 시기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브런치에 글을 썼는데, 반응이 좋았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사인 외부기고 등 글을 쓸 기회가 점점 많아졌다. 각자도생인 프리랜서의 삶, 선배가 내 보호막이 되어 주지 않았던 일들, 출산 후 이어진 경력단절, 노동조합을 시작한 이유 등을 복기하다 보니 ‘내가 가치지향적 인간이구나’라는걸 알게 됐다.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라는 것도 책을 쓰면서 알게 됐다. ‘내 나이와 위치에서 나름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 노력하고 있구나, 그 전보단 제법 괜찮은 사람이구나, 완결은 아니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Q. ‘어느 지방 방송작가가 바라본 노동과 연대에 관한 작은 이야기’라는 책의 부제가 인상 깊었다.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프리랜서는 각자도생이다. 방송국은 작가가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제작비라는 카드를 쥐고 쥐락펴락한다. 친구와 한 팀에서 열심히 일하다가도 예산이 줄어 작가를 한 명으로 줄여야 하는 상황이 오면 ‘내가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노동조합은 이 구조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그전에는 답답해도 참고 넘어갔던 것들이 내 안에 억눌려 있었다. 방송국은 50만 원짜리 일에 30만 원만 주고 ‘네 연차에 하기 어려운 일이야, 너에게 좋은 기회야’ 따위의 말을 했다. 여성이 많은 직군 특성상 성희롱에 노출되는 일도 많았다.

이런 제반 환경이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물론 내가 나이를 먹고 연차가 쌓인 점과 갑질과 성희롱에 예민해진 사회적 분위기도 작용했지만 노동조합이 생겨 작가들이 서로 뭉칠 수 있게 된 것도 큰 힘이 됐다. 이 과정에서 내가 배우고 느낀 것을 전달하고 싶었다.

Q. 책 앞부분에 ‘지방에서 방송작가 하기’라는 글이 있다. 서울과 비서울의 방송작가 노동 환경에 어떤 차이가 있나?

방송국에서 일한다고 하면 대부분 화려한 장면을 떠올린다. 연예인을 보거나 돈을 많이 번다는 인식이 있지 않나. 하지만 지방 방송작가는 서울과 비교해 적은 원고료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한다. 연예인보단 공무원과 교수를 볼 일이 더 많다. 최근 tvn 프로그램 ‘유퀴즈 온 더 블록’에 방송작가 14명이 붙은 걸 본 적이 있다. 지방은 대부분 한 프로그램에 한 명의 작가가 붙는다. 작가 수만 봐도 예산 규모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나고 자란 대구에서, 지방에서 일하기에 얻는 보람이 있다.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 대구 지하철 참사나 코로나19 확산 등 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전할 수 있었던 순간들이다. 책에도 썼듯 누군가는 화려하고 큰 무대와 세상을 만들기를 바라겠지만, 나는 묵묵히 세상의 저변을 지키는 이들의 힘을 믿는다. 지방방송의 역할이란 그런 믿음을 지켜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하는 게 참 즐겁다.

Q. 대구‧경북은 전국에서 처음 방송작가 지회가 출범한 지역이다.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난 대구 1호 조합원이다. 방송작가 노동조합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는 작가들이 몇 없으니 일단 방송사에 한 명씩만 모으자는 생각으로 작가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지역에서 간담회가 열리니 전화를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서로 연결이 되고 지회를 만들게 됐다.

영남지회가 출범할 땐 부지회장으로 임기를 시작했다. 지회장을 맡았던 작가 친구가 방송작가유니온 지부장이 되면서 영남지회 지회장을 맡게 됐다. 전임 없이 다들 작가 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노동조합 일을 해서 늘 쉽지 않았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기에 ‘나라도 하지, 뭐’라는 생각으로 맡았다.

▲권 작가는 “후배들이 고민상담을 위해 연락을 할 때 뿌듯하다”며 선배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노동조합이 생긴 뒤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후배들이 ‘선배, 어떻게 해요’라고 고민 상담을 해올 때 ‘연락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당장 해결해줄 수 없더라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선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 너무 뿌듯하다. 대구경북은 노동조합 조직률이 광주전남 등 타지역 대비 높다. 부산경남과 대구경북이 영남지회로 묶여 있는데, 조직 규모가 커지면서 두 지역을 분리하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방송작가는 노동조합을 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프리랜서인데다가 방송사별로, 작가 개개인별로 상황이 너무 다르다. 그럼에도 방송국에 종속돼 일을 한다는 점은 모두 같다. 근로자성 인정 항목 16개를 두고 체크해 보니 나도 13개나 해당되더라. 아직 갈 길이 멀다.

Q. 노동조합이 생긴 이후 5년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2017년 말 문화체육관광부가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를 만들었고, 방송국에도 2018년 6개월 단위의 계약서를 체결하라는 권고 공문이 내려왔다. 우리도 계약서를 작성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방송국이 작가에게 계약 해지 통보를 하는 무기로 계약서가 쓰이는 경우가 생겼다. 처음부터 우려한 지점이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최근에는 근로자성 인정이 주요 화두로 떠오르자, 방송국은 ‘근로자성 지우기’에 열심이다. 작가들에게 주던 책상을 빼고 ‘공용 책상’이라고 명명하거나 컴퓨터, 전화기 같은 비품을 다 없앴다. 노동조합의 존재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Q. 결혼과 출산, 육아를 거치고 다시 현장에 복귀했다. 어떤 선배가 되고 싶은가?

롤모델이나 존경스러운 선배 같은 수식어는 부담스럽다. 대신 ‘편안하게 연락할 수 있는 선배, 유쾌한 선배’로 남고 싶다. 방송작가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정년이 없지만, 그럼에도 오래 일한 선배나 기댈 수 있는 선배를 찾기가 어렵다. 가능한 한 오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