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겉과 속’ 다른 ‘그린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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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린북>은 만듦새만 보면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노예해방(1865년)이 선언된 지 100년 가까이 지난 1962년, 천재 음악가라는 칭송을 받으며 높은 교양 수준의 삶을 누려온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마허샬라 알리)는 흑인에겐 험난한 지역인 미국 남부로 연주 여행을 떠난다. 위험한 여정에 보디가드 겸 운전사로 술집 기도 출신 백인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를 고용했다.

두 남자는 생활 환경과 성격 등 모든 면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 셜리는 성공한 흑인이고, 토니는 못 배운 이탈리아 이민자다. 셜리는 천재적 재능에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고상한 흑인이다. 백악관 초청 연주회에 불려갈 정도로 정치적 배경도 든든하다. 토니는 입담과 수완, 주먹만 믿고 뒷골목에서 살아왔다. 전기설비를 고치러 온 흑인 기사들이 사용한 유리컵을 부인 몰래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로 완고한 인종주의자다. 여러 모로 갈등을 만들 두 남자는 8주간 순회공연 중에 특별한 우정을 쌓는다.

이미 세상을 떠난 실제 인물의 삶을 극화한 영화는 두 사람이 우정을 쌓는 과정을 짜임새 있게 보여준다. 영화에서 문화와 배경이 서로 다른 인물들이 마음을 열어가는 것은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질적인 캐릭터가 서로 스며드는 모습이 유독 자연스럽다. 셜리가 당하는 차별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호텔에서는 흑인을 재울 수 없다는 이유로 숙박을 거부하고 공연하기로 한 레스토랑에서는 전통을 운운하며 출입을 거절한다. 도로에서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이 불심검문을 한다. 멋진 공연 뒤에는 흑인과 같은 화장실을 쓸 수 없다는 조롱을 받는다. 토니는 셜리가 시시때때로 처하는 인종차별과 폭력을 지켜보고 그를 이해하게 된다.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토니는 흑인 셜리를 위해 차별과 맞선다. 차별을 그저 묵묵히 견뎌내던 셜리도 마지막에는 변화한다. 우아함과 고상함, 품위와 고전음악의 세계에 갇혀 있던 그가 흑인 재즈 바에서 흑인 밴드 연주에 맞춰 재즈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 셜리의 변화를 상징한다. 토니는 서서히 완고한 인종주의 편견을 내려놓고, 셜리는 완고한 문화적 우월의식을 내려놓는다. 다만 인종차별을 개인 간 관계를 통해 치유될 수밖에 없는 문제로 보는 영화의 태도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는 인종차별을 넘어 화해와 화합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담아 호평을 받았지만, ‘겉과 속’ 다르다는 비판을 받는다. 겉은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남우조연상, 각본상을 수상한 ‘올해의 영화’다.

하지만 실화에 기반한 이 영화는 사실 왜곡 논란에 이어 각본가와 감독, 배우의 망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영화의 주인공 돈 셜리의 유족 동의 없이 촬영됐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유족은 제작진이 고인의 뜻을 무시한 채 각본가 닉 발레롱가의 말만 믿고 영화를 제작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닉 발레롱가는 주연 토니 발레롱가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경험담을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유족은 “셜리와 발레롱가는 친구 관계가 아니었고 발레롱가의 근무 태만으로 셜리가 고통받았다. 또 닉 발레롱가가 돈 셜리의 실제 삶을 왜곡했다”고 항의했다. 제작진은 두 사람의 친분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내놓지 못해 논란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각본가 닉 발레롱가의 SNS도 논란을 키웠다. 닉은 2015년 11월 당시 미국 대통령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를 옹호하는 글을 SNS에 올리며 무슬림 혐오 발언을 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토니 역을 맡은 비고 모텐슨이 영화 홍보 과정에서 흑인 차별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흑인 여행자들이 거부당하지 않고 먹고, 쉴 수 있는 숙소와 식당을 안내하는 실제 책 이름을 제목 삼은 영화의 속내가 달라보이는 이유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