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권력의 속성은 예나 지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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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0월 29일이면, 날씨는 본격적으로 겨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추운 날씨를 뚫고 오래 알고 지내던 참봉 권인보가 예안에 사는 김령을 찾았다. 예안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문안 인사차 아이들 보냈더니, 권인보가 얼굴을 보겠다면서 발걸음을 재촉한 터였다. 조카인 김광철과 같은 고을에 사는 김염까지 모이니, 술자리가 커져 버렸다. 한양 소식에 밝은 권인보였던 터라, 당연히 술안주는 한양, 그것도 조정의 이야기였다.

이 기록이 있던 1638년은 인조반정이 일어난 지 15년이나 된 해였다. 게다가 병자호란을 겪은 지 채 2년도 안 지난 시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권인보의 말에 따르면, 인조반정 공신들은 전쟁 패배 이후에도 자신들의 권력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행태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고 했다. 특히 당시는 인조반정 이후 시간이 꽤 흘러, 공신보다는 주로 그 아랫대에서 그 권력을 이어가고 있어 더욱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조익趙翼(호는 浦渚, 1579~1655)의 일만 해도 그랬다. 당시 예조판서였던 조익은 병자호란 때 종묘와 사직을 따라 강화도로 향해야 했다. 그런데 조익은 자신의 몸을 피했다고 했다. 영남 남인들이 보기에 조익은 전쟁을 피해 몸을 숨겼던 것이다. (실제 이 당시 조익은 아버지의 실종으로 아버지를 찾기 위해 자기 자리를 떠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전쟁이 끝난 이후 탄핵 전문부서인 사간원의 간관들이 그를 삭탈관직한 후 위리안치(유배의 일종)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당시 병조판서이자 조익의 친척이었던 이시백을 비롯한 사람들이 조익을 구명하기 위해 나섰다. 당시 영남에서는 조익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반정공신의 수장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이귀의 아들 이시백이 그를 구하려 들자, 공신들의 자식들이 서로를 두둔했던 것으로 보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조익은 예조판서로서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영남 남인들이 볼 때 처벌받지 않은 상황도 문제였지만, 이들이 공신의 아들로서 세력을 믿고 법을 무시하는 듯한 상황이 더 문제였다.

공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죄를 범하고도 문제 되지 않는 경우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윤이지는 윤방尹昉(1563~1640)의 아들로, 윤방의 아버지는 서인의 거두였던 윤두수尹斗壽(1533~1601)였다. 이러한 계보탓이었는지 윤방은 종묘와 사직에 있는 신주를 거적때기로 덮어 옮긴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명에 의해 불문에 부쳐졌다. 현대의 관점에서 이게 뭐 그리 큰일일까 싶기도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이는 엄청난 범죄였다. 종묘와 사직의 신주는 나라의 이념을 상징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신성했다. 그런데 이를 거적때기로 덮어 옮겼으니, 살아 있는 게 신기했다.

그러나 이 기록이 있던 시점에서 보면, 인조 역시 이들을 비호하기에 바빴다. 물론, 이후 이 문제로 윤방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귀양을 가기는 했지만, 기록이 있던 이 당시까지는 인조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심지어 인조는 윤방의 일을 탄핵하는 여러 대간들을 파직하는 무리수까지 두면서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탄핵을 전문으로 하는 대간들의 입까지 막을 정도였으니, 언로言路를 중시했던 당시 사림士林들에게 이 상황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얼마 뒤 조정에서 인사가 발표되었는데, 모두가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 윤방으로 인해 탄핵 전문 부서인 사간원 관원들이 파직당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 윤이지는 다시 버젓하게 도승지가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야 아버지 잘못이 아들에게 미치는 게 부당할 수 있었지만, 조선시대에서 아버지는 삭탈관직을 당했는데 아들이 승진, 그것도 왕의 비서실장 격에 해당하는 도승지가 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인조는 윤방의 삭탈관직이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이루어졌음을 인사를 통해 보여 주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윤이지는 도승지가 된 후, 왕에게 새로운 건의를 했는데, 이로 인해 전국이 다시 들썩였다. 그는 조정에 신하들이 자리를 너무 비우는 게 문제라면서, 법에 의해 휴가를 얻어 잠시 지방에 내려간 신하를 제외하고는 모두 관직을 내놓고 귀향하도록 법을 고치자고 건의했다. 조선시대 역시 중앙 관료들의 업무는 적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늘상 부족했고, 이 때문에 휴가 간 관료들의 복귀를 채근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게다가 지역에 있으면 부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니, 그 상황은 이해할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울에 있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관직에 임명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러나 인조는 윤이지의 말을 받아들여서 “지금부터 반드시 서울에 있는 자로 관직에 임명하고, 비록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관원일지라도 시골에 있는 자는 임명하지 말라”고 명령하니, 문제가 커졌다. 이 법이 효력을 발휘하면 지방 사람들의 출사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 임명될지 모르는 데 무턱대고 한양에 집을 구해 놓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한양에 사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관직을 임명할 수밖에 없으니, 공신들의 후손들만 대대손손 관직에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영남 남인들의 눈으로 보면, 법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길게 늘이는 수단이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때 정권을 잡은 북인 세력을 제외하면, 영남 남인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았다. 조선의 상황에서 명분보다 실리를 앞세운 광해군의 대외정책이나 폐모살제 같은 강상의 문제까지 용인받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남 지역에서는 인조반정 이후 북인 세력과 결탁한 지역민들을 처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집권 세력은 또다시 북인처럼 법을 넘어서고 자기 권력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에만 매진하면서, 영남 남인들에게서 권력자들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반정의 본래 목표는 사라진 지 오래이고, 반정공신들의 횡포만 대를 잇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