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유전무죄, 무전유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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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iced by Amazon Polly

1799년 음력 12월 초하루, 노상추는 한강진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강진은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강변 곳곳에 설치된 진津과 도渡 가운데 하나로, 노량진과 송파진, 광진, 사평 등과 더불어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몇 안 되는 중요한 나루였다. 한강진에서 일어난 소동이니 또 뱃삯을 두고 일어난 실랑이려니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큰 소동이었다.

이 소동은 한강을 건너던 이익해李翼海와 부자 때문이었다. 양지陽智(지금의 용인) 사람으로 함경도 강령康翎 수령이었던 이익해는 아들 이완보李完保를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그러나 고향 가는 길이라도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던 듯했다. 이익해는 강령 수령 임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던 차에 잠시 말미를 얻어 이후 벼슬자리를 구할 요량으로 한양에 왔던 터였다. 그러나 별다른 소득이 없어서 내심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이들 부자는 한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지만, 불편한 심기 탓인지 아들 이완보가 돈을 내지 않고 배에서 내렸다. 뱃삯을 달라는 사공의 요구는 당연했지만, 이완보는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뱃사공에게 풀었다. 자신을 업신여기는 듯한 뱃사공에게 돈을 주지 않겠다고 버텼고, 실랑이는 완력 싸움으로 번졌다. 돈을 받아야 하는 뱃사공은 결국 이완보를 붙잡고 주먹다짐까지 했고, 사태는 양반 폭행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익해까지 달려들어 아들을 구했지만, 이 틈에 아들 이완보는 곁에 있던 삿대를 들어 뱃사공을 때렸다. 뱃사공이 아픔에 악을 쓰자 이 소리를 들은 한강진 별장이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한강진은 한강 상류 송파진과 하류 양화진 사이에 있던 나루였다. 그러다 보니 한강진은 서울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치는 곳 가운데 하나였고, 당연히 서울 경비와 왕의 경호를 위한 5개 요지일 수밖에 없었다. 군영이 있었고, 이들은 이곳의 치안과 경비를 함께 담당했다.

한강진 별장이 보기에 이 사안은 명백했다. 배를 탔으면 뱃삯을 내야 했는데, 이를 내지 않은 이익해 부자에게 잘못이 있었다. 별장은 이 사안의 직접적 이유가 된 이완보를 결박하고 곤장 15대를 친 후, 소동의 책임을 물어 한강진에 구류했다. 일이 커지자, 이익해는 급히 발걸음을 돌려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평소 안면이 있는 장용영 대장에게 이 같은 사정을 알렸다. 이 말을 들은 장용영 대장은 왕에게까지 이 내용을 보고했는데, 그 내용에는 일방적인 이익해의 입장만이 반영되었다.

사정이야 어떠하든 이익해는 조정 관료 신분이었고, 뱃사공이 신분 상하를 따지지 않고 뱃삯을 함부로 거둔 것이 잘못이라는 게 요지였다. 더불어 뱃사공이 본분을 어기고 함부로 뱃삯을 거두도록 관리하지 않은 한강진 별장 역시 잘못이 있다고 보고했다. 장용영은 정조가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만든 최측근 경호부대로, 장용영 대장의 보고는 영향력이 강했다. 그런데 그런 장용영 대장도 신분은 양반이었고, 조정 관료였다. 양반과 관료의 입장에서 볼 때 억울한 점이 있다고 호소하는 이익해의 입장을 그대로 따른 이유였다.

이렇게 되니 정말 억울한 이는 한강진 별장이었다. 한강진은 왕을 경호하기 위해 창설된 장용위의 관할이었다. 당연히 한강진 별장 역시 장용위 소속이었다. 힘을 실어줘도 못마땅할 장용영 대장이 스스로 자신의 수하가 잘못했다고 하니, 한강진 별장으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원래 별장의 직권으로 곤장까지 칠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양반인 이완보에게 자기 직권으로 곤장까지 때렸으니 절차적으로 잘못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왕에게까지 보고가 되었으니, 애시당초 조용하게 처리하기는 그른 일이 되었다. 정조는 이 보고를 기반으로 한강진 별장의 직위를 뺏고, 곤장 20대를 때린 후 복마군卜馬軍으로 강등시켰다. 무과에 발탁된 후 왕의 최측근 호위부대로서 경호의 요충지 가운데 하나인 한강진을 관리하던 별장이 약한 자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군마軍馬를 관리하는 한직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뱃사공은 양반을 때렸다는 이유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 과정에서 사공이 노동의 대가로 받아야 하는 뱃삯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소동을 들은 노상추가 보기에도 그 이유는 명백했다. 배를 탔으면 뱃삯을 내야 하고, 이것은 양반과 상놈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강진 별장은 이러한 명백한 이유에 따라 처결했다. 한강진 별장 입장에서는 이러한 상식을 무시하고 양반이라고 자기 권력을 앞세우는 젊은 이완보에 대한 따끔한 처벌도 필요했다. 그런데 이 같은 명백한 이유가 양반과 관료 사회를 때렸다는 이유에 따라 판단이 바뀌었다. 저잣거리에서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상식적 판단이 양반과 관료들만이 모인 조정에 들어가기면서 판단의 기준도, 그리고 그 결과도 바뀌었다.

노상추의 의심처럼 특정 세도가가 개입되었을 수도 있다. 양반이었던 노상추마저 그렇게 판단할 정도라면 한강진의 소동이 얼마나 일상적 판단에 맞지 않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노상추도 몰랐을 것이다. 굳이 세도가가 개입되지 않아도, 사공의 정당한 노동 대가를 무시할 수 있는 신분과 지위 그 자체가 세도라는 사실을……. 권력이 특정 신분에 한정되고, 따라서 특정 신분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신분을 보호하는 일을 우선하다 보면,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판단마저 그들 사회 속에서 쉽게 무시되기 때문이다. 이를 대표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무전유죄, 유전무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