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시대착오적이고 공정하지 않은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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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영화 <밀양>의 각본집이 나와서 책을 읽으며 예전에 본 영화를 머릿속으로 맞추어봤다. 아들을 유괴범에게 잃은 신애(전도연)는 삶의 욕구를 완전히 상실했다가 교회에 나가면서 가까스로 삶의 의지를 되찾는다. 그녀는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한 하나님에게 보답하고 싶다면서, 교도소로 유괴범을 찾아가 “용서한다”는 말을 해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만난 유괴범은 자신도 하나님을 받아 들였다면서 이미 하나님이 “제 죄를 용서해주셨다”고 말한다.

신애는 절규한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어요?” 목사는 “주님 말씀대로 사는 게 참 어려운 겁니다”라는 말만 되뇐다. 무슨 말씀일까.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은 맞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23~24절에서 예수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다. 이 구절에 따르면, 가해자가 피해자를 건너뛰고 하나님과 용서를 직거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목사는 미치기 일보 직전인 신애에게 그 유괴범은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으며, 그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애(自己愛·self-love)라고 말해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목사는 예수의 가르침을 옳게 해석해 주지 않았다. 믿는 것이 먼저냐, 아는 것이 먼저냐. 종교는 늘 앎보다 믿음을 중시해왔지만, 한국 교회는 특히나 믿음을 내세우고, 말씀은 가르치지 않는다. 유괴범이 신자가 된 기적(?), 나아가 한국에 초대형교회가 번성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한국 교회는 잘 믿는 신도를 원하지, 잘 아는 신도는 원치 않는다.

자크 데리다는 <용서하다>에서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며, 용서란 “용서 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지하철에서 내 발등을 밟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의 축에 들지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하다>는 이런 논변으로 괴문서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데리다는 프랑스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용서(pardon)라는 단어를 ‘par(파르)’와 ‘don(동)’으로 나눈다. par는 ‘~로’, ‘~에 의한’을 뜻하고, don은 ‘기증’을 뜻한다. 이처럼 용서를 뜻하는 프랑스어 pardon은 ‘기증-으로’, ‘기증-에 의한’이라는 뜻을 품고 있는데, 이는 프랑스어만 아니라 에스파니아어 person, 포루투갈어 perdâo, 이탈리아어 perdono도 거의 비슷한 사정이라고 한다. 데리다는 서양에서 ‘용서’는 ‘기증’과 어원을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똑같은 욕망을 갖고 있다고 한다. 즉, 용서하는 사람도 기증하는 사람도, 기증을 받은 사람과 용서를 받은 사람에게 바라는 게 있다. 우리는 기증을 받은 사람과 용서를 받은 사람이 나에게 보답을 하기를 바란다. 게다가 우리는 용서하고 기증함으로써 용서받은 사람과 기증받은 사람을 마구 휘두를 수 있는 ‘주권자’가 되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용서하고 기증하면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수 있고, 주권자가 아닐 수 있을까? 용서하는 사람은 용서 받는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됨으로써 무형의 보답을 받게 되고 주권자가 된다. 혹시 신애에게도 그런 욕망이 있지 않았을까?

▲지난달 30일 신년 특별사면으로 사면 복권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으로 귀가했다. (사진=권우성 오마이뉴스 기자)

작년 12월 27일, 윤 대통령의 사면·복권 결정으로 이명박은 잔여 형기 14년 6개월과 벌금 82억 원을 모두 면제 받았다. 데리다는 대통령의 특별 사면권은 왕정과 함께 사라졌어야 할 유제(遺制)라면서, 범죄자가 주권자 즉 국민에게 저지른 죄를 국민으로부터 한시적인 위임을 받은 제3자(대통령)가 마음대로 사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윤 대통령이 국민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이명박을 면죄해준 거나 유괴범이 신애 몰래 하나님으로부터 면죄 받았다고 우기는 상황과 같다. 두 경우 모두에서 용서의 주체인 피해자가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