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판도라의 상자는 덮어둬 ‘완벽한 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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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지기 친구들의 부부동반 집들이. 근황과 지인 뒷담화 등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던 이들이 한가지 게임을 시작한다. 식사 도중 걸려오는 휴대전화 통화 내용이나 메시지를 공유하기로 한 것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휴대전화를 탁자 위에 놓고 전화는 무조건 스피커폰으로, 메시지와 이메일은 소리를 내 읽으면 된다. 재미로 시작한 게임은 서로에게 감출 것 없다고 자부하던 이들의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완벽한 타인>은 여러 나라에 리메이크 판권이 팔린 이탈리아 영화 <퍼펙트 스트레인저>가 원작이다.

등장인물은 총 7명이다. 고지식하고 가부장적인 변호사 태수(유해진)와 남편을 상전처럼 모시고 문학 수업에 푹 빠진 전업주부 수현(염정아). 호화로운 집을 장만해 친구들을 초대한 성형외과 전문의 석호(조진웅)와 정신과 의사인 그의 아내 예진(김지수). 레스토랑을 개업한 준모(이서진)와 수의사인 어린 아내 세경(송하윤). 최근 교사를 그만두고 이혼한 백수 영배(윤경호), 그는 새로 만나는 연인이 아프다며 혼자 왔다.

몇몇은 휴대전화 공개를 원치 않지만, 일부는 “숨기는 거 없다며? 찔리는 거 있어?”라며 추궁한다. 결국 마지못해 게임에 동의하지만 저마다 내면은 복잡하다. 전화벨과 메시지 수신음이 울릴 때마다 한 사람씩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소하게는 다른 사람 뒷담화가 공개돼 서로 얼굴을 붉히거나, 비밀을 애써 숨겨보려 친구와 휴대전화를 바꾸기도 한다.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고도 해보지만 싹트는 의심에 큰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영화는 의사 부부의 새집에서 별다른 장치 없이 휴대전화에 의지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비밀은 점차 강도가 세지면서 이야기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다음엔 또 뭘까?’라는 기대가 생긴다. <완벽한 타인>은 물음표를 던지는 영화다. 불편한 진실이 낱낱이 까발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작과 끝에 배치되는 ‘월식’은 영화를 관통하는 상징물이다.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지는 월식은 불길한 징조를 뜻한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블랙코미디로 보이는 이 영화의 강력한 힘은 ‘공감’이다. 필수품이지만 그만큼 비밀이 담겨 있는 휴대전화를 통해 우정, 사랑, 부부관계, 고부갈등,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 부재, 심지어 성소수자 문제까지 폭넓게 다뤄낸다.

위기의 순간마다 클로즈업되는 표정·눈짓·숨소리까지 계산한 듯 찰떡궁합인 배우들의 자연스런 연기와 핸드헬드 촬영 기법으로 얼굴을 클로즈업하거나 화면을 끊지 않고 한 호흡에 다 담아내는 ‘롱 테이크’ 등 인상적인 연출로 몰입도를 높인다. 다소 수위가 높은 성적인 농담과 잘 짜인 원작의 플롯(구성)을 한국적인 설정으로 바꾼 것도 어색하지 않다.

아쉬운 점도 있다. 영화는 ‘대체 마무리를 어떻게 하려고 이러나’ 할 정도의 파국으로 치닫다가, 영화적 장치를 통해 결말을 낸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마무리되면서 뒷맛이 씁쓸하다. 현대인에게 ‘판도라의 상자’로 불리는 휴대전화를 열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뒤에 고작 상자를 다시 덮어두자는 결론을 맺는 셈이다. 친구 간 은밀한 관계를 뜻하는 식상한 설정도 아쉽다.

‘사람은 세 가지 삶을 산다. 공적인 삶, 개인적인 삶, 비밀의 삶.’ 영화 말미에 영화 주제를 담은 문구가 나온다. 영화 상영 내내 배꼽 잡으며 웃다가 극장을 나설 때 간담이 서늘해지는 까닭은 충실한 시종이었던 스마트폰 속 내용이 공개된다면 어떨까, 라는 위기감이 들기 때문이다.

나만의 비밀이 없던 마지막 해는 2006년이었다. 이듬해 1월 아이폰이 등장한 이후 인류의 일상은 스마트폰 속으로 빨려들었다.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고 게임을 하고 메일을 확인한다. 계좌 관리도 하고 택시도 부르고 쇼핑도 한다.

스마트폰이 출시되며 사회의 역학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가두고 있어야 할 감정을 소셜미디어(SNS)에 엎지르는 바람에 괴로워하는 일도 잦아졌다. 스마트폰 덕에 편리해지고 인맥은 넓어졌지만 깊이는 얕아졌다. 스마트폰으로 유통되는 ‘패스트푸드 정보’에 정신을 팔다 하루가 간다. 스마트폰 액정에 비친 삶은 그래서 아슬아슬하다. 스마트폰에는 사생활이 A부터 Z까지 죄다 들어 있으니까. 누구 대사처럼 “우리 삶의 블랙박스”다. <완벽한 타인>은 당신에게 묻는다. 꽁꽁 싸매고 숨긴 비밀이 있을까?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