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인재 추천마저 장악한 당파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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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음력 11월, 노상추가 선전관이 될 수 있었던 건 말 그대로 행운이었다. 노론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남인 출신 무과 합격자가 선전관 천거를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3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과거 시험인 식년시에서 33명의 대과 합격자만 뽑는 문과와 달리, 무과는 군 병력 관리 차원에서 훨씬 많은 합격자를 뽑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국방을 튼튼히 하겠다고 많은 무과 합격자를 선발하다 보니 ‘만과(만 명이나 뽑는 과거 시험)’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나 조선 관직 구조상, 게다가 문과가 중심이었던 조선 관료 사회 성격상, 많은 무과 합격자가 모두 고위 관료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 요즘도 암묵적으로 공무원 조직에서 승진할 수 있는 자리가 따로 있는 것처럼, 무과 합격자들에게도 무관으로 출세하기 위해서 반드시 들어가야 할 엘리트 코스가 따로 있었다. 일명 ‘선천宣薦’에 드는 것으로, 예비 선전관을 미리 발탁해 두는 제도이다. 선전관은 왕의 시위를 담당하고 무과의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등 무관의 요직 가운데 요직이지만, 그 정원은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당연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선천에 드는지 여부는 무관으로서의 미래를 결정했다.

당연히 선천은 실력 중심으로 선발하는 과거 시험보다, 가문이나 당색이 힘을 발휘했다. ‘천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누군가 천거하고 그 천거가 받아들이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천거하는 다수도 노론이었고 이를 받아들이는 이도 대부분 노론이었으니, 18세기 후반 남인 출신 노상추가 선천에 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운 좋게 활쏘기 테스트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 정조의 눈에 띄었고, 정조는 영조 때 수문장으로 절개를 보였던 노상추의 할아버지 노계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강력한 인물의 천거가 그를 선전관으로 발탁했다.

1792년 음력 12월 14일, 선전관들이 근무하는 선전관청에서 선천일회宣薦一會가 열렸다. 선천에 들 인물을 결정하는 회의였다. 현직 선전관들이 선천에 들 인물을 추천하면 이를 심의해서 최종 선천에 들 인물을 결정했다. 노상추는 비록 왕명에 의해 선천에 들었지만, 모든 선전관들처럼 그에게도 선천에 들 인물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주로 무과 합격자나 한량(정조 때 한량은 무과 합격 이후 직위를 받지 못한 사람을 의미했다)들 가운데에서 추천할 수 있었는데, 이날은 무과 출신은 각 1명씩만 추천하고 한량은 2명씩 추천할 수 있도록 했다.

노상추 입장에서는 선전관이 된 지 불과 1달 만에 열린 회의여서, 그로서도 처음 참여하는 선천일회였다. 비록 노상추는 당색이 영남 남인지만 남들에게서 치우친 추천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 위해 며칠 동안 신중에 신중을 더해 추천할만한 인물을 물색해 온 터였다. 먼저 정유검이 무과 출신인 경상도 사람 왕윤택을 추천하고, 한량 가운데에는 조명규를 호명했다. 노상추는 무과 출신자 가운데에는 추천할만한 사람이 없었고, 한량들 가운데에서 정선과 홍숙을 추천했다. 특히 홍숙은 당색과 상관없는 서울 사람 홍백순 아들로, 이전 포도대장을 지냈던 홍시주의 종증손이었다.

다른 선전관들의 추천도 이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모두 선천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추천된 인재들에 대해 점수를 매겨, 최종적으로 선천관청의 이름으로 선천에 들 인물을 추천하는 과정이 남았다. 무재武才와 사람됨, 학문, 가문 등을 따져서 기준 점수가 20점이 넘는 사람을 천거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정유겸이 추천한 경상도 사람 왕윤택은 16점을 받는데 그쳤고, 조명규와 홍숙도 19점에 머물러 탈락했다. 노상추가 추천한 인물 가운데에는 정선만 남았는데, 다행히 정선은 20점을 받았다.

그러나 정선은 천거 명단에 들지 못했다. 선천관청 부행수였던 김성화金聖和가 정선의 천거를 부득부득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정선은 중간에 점수를 더 받으려고 꾀를 부렸다”라면서 반대하는 이유를 밝혔는데, 선천에 들기 위해서 모든 무과 지망생들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이는 이유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다른 선전관이 추천한 한량 김정주金鼎周 역시 20점이 넘었지만, 동일한 이유에서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이를 본 노상추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 힘들었다. 20점이 넘는 인물 가운데 김성화가 빼 버린 정선과 김정주만 남인이기 때문이다.

이날 선천일회를 통해 천거가 결정된 인물은 총 33명이었다. 무과 출신 7명에 한량 26명이 더해진 결과였다. 이렇게만 보면 무과 합격 이후 직위나 직책 없는 사람들을 배려한 결과로 보였지만, 이들의 당색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량 26명 가운데 노론은 16명, 소론은 7명, 소북은 1명, 그리고 남인이 2명이었다. 노상추가 화가 난 이유였다.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늘 탕평을 강조했지만, 정작 무관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선천에서조차 당파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구색을 맞추기 위해 고르게 여러 당색을 가진 인물들을 선발했다는 사실만 가지고 위로를 삼아야 할 판이었다.

권력은 세勢를 통해 만들어지고, 세는 권력을 통해 확장된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이용하여 세를 확장하는 일은 그래서 자연스럽기도 하다. ‘능력’과 ‘공정’이라는 신을 섬기는 현대 사회라고 해서 이 같은 현장이 사라지지 않는다.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는 능력과 공정이라는 이념적 목표를 제시하지만, 권력을 잡으면 늘 권력을 유지하는 게 최종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민주주의의 발전에 따라 구색을 맞추는 비율이 조금씩 는다는 게 그나마 위로라면 위로였는데, 요즘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