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왕은 걱정만 하고, 정책은 걱정만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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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란 말에는 희망이 더 많이 내포되어 있지만, 1752년 새해 첫날 영조는 시름이 더 많았다. 이유는 민생경제 때문이었다. 1751년, 영남지역으로만 한정해 보아도 흉년은 재앙에 가까웠다. 한 해 동안 영남의 자연현상은 흉년을 위해 그렇게 계획해도 쉽게 나타나지 않을 일이었다. 벼를 심어야 할 때 가뭄, 보리 수확 기간에 홍수, 그나마 열매라도 맺힐 시점에 불어 닥친 큰바람과 남은 잎사귀까지 모두 갉아 먹은 충해까지, 영남의 들판은 그야말로 일어날 수 있는 재이災異의 축소판이었다.

농사를 시작하는 새해 첫날 나오는 왕의 권농교서(농사를 권장하는 왕명이 담긴 문서)는 조선시대 경제 부흥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슬프다. 온갖 식물들이 소생하는 시절이건만, 백성들도 함께 소생하는가? 그렇지 못한가? 나의 생각이 여기에 미친 이유는 흉년 때문이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영조의 권농교서는 정말 시름과 근심이 가득했다. 특히 관북北關(함경도 지역)의 보고서는 시름으로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임금의 시름과 걱정을 생각하면서, 지방관들은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고 굶주림을 면하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권농교서를 받아든 산음현(지금의 경상남도 산청지역) 백성들은 왕의 걱정이 현실적이지 않았다. 왕의 시름과 근심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진 이야기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751년 음력 12월 28일, 균역법의 실시에 따라 조정에서는 산음현에도 삼베(대마 혹은 삼의 줄기로 만든 베)로 납부하던 군포를 목면(목화에서 거둔 실로 짠 베)으로 납부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산음현은 원래 목화 재배에 적합한 토양이 아니어서 백성들은 산음현 토산품인 삼을 재배하여 삼베로 군포를 납부했는데, 이를 무시하고 일괄 목면으로 거두려 했다.

조선 후기 본격적으로 실시된 균역법은 백성들의 고충을 덜기 위한 제도였다. 조선은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양인 남성은 모두 군역을 져야 했는데, 그렇다고 이들이 모두 군에 소집되어 있을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군역은 실제 군에 입대하는 정군正軍 1명에 정군을 경제적으로 보조하는 보인保人 2명을 두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군의 시스템이 바뀌면서 정군과 보인이 직접 연결되기 어려웠고, 군에 가지 않은 양인들은 세금화 된 군포를 납부해야 했다.

군포가 정규 세금처럼 되자, 이를 피하기 위한 많은 비리가 발생했다. 게다가 여전히 정군과 보인의 관계에 기반하다 보니, 세금의 양 역시 들쭉날쭉했다. 군포를 피하는 사람이 늘자 양인들의 군포 부담도 늘었고, 세금의 형평성도 무너졌다. 당연히 군포에 대한 불만이 커지는 악순환이었다. 균역법은 과중한 군포 부담과 불균형을 모두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였다. 대략 1인당 2필씩 내던 군포를 1필로 통일했다. 그리고 균역청을 설립하여 부족해진 군포를 보충할 방법을 조정 차원에서 강구하도록 했다.

이처럼 균역법은 취지로만 보면, 좋은 제도였다. 산음현 백성들 입장에서도 2필씩 내던 삼베가 목면 1필로 줄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부담이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산음현 백성들 입장에서 이는 또 하나의 재앙이었다. 당시 경상감사였던 조재호까지 나서서 이 정책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보고서(장계)를 올린 이유였다.

산음현이 군포를 삼베로 낸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1714년 경상도를 찾았던 어사가 올린 보고서에 따라 산음현은 토산품인 삼베로 내기 시작했고, 이게 벌써 37년이나 되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산음현은 목화가 생산되는 토양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목면으로 군포를 내기 위해서는 산음현 토산품인 삼베를 팔아 이 돈을 가지고 목면을 구입해서 군포를 내야 했다. 당연히 시장의 원리에 따라 삼베 가격은 떨어지고 목면의 가격은 올라, 군포를 내야 하는 시점만 되면 산음현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기 일쑤였다. 1714년 산음현을 찾은 경상도 어사도 이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했고, 이후 줄곧 삼베로 군포를 냈다.

그런데 균역법 실시로 산음현도 동일하게 목면으로 납부하라 하니, 이는 산음현을 40년 전 상황으로 돌려놓는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시점에서도 군포로 받는 목면 값이 삼베 값보다 훨씬 비싸니, 산음현 백성들 입장에서는 2필을 1필로 줄여주었다고 해서 부담이 준 것도 아니었다. 경상감사 조재호는 조선의 법전인 《속대전續大典》 가운데 세금 관련 기록을 담은 <호전요부조戶典搖賦條>에서 “호남의 운봉과 장수, 그리고 영남의 함양과 안음, 산음은 삼베를 짓는다”라는 기록까지 들면서 삼베로 납부하게 해 달라는 청을 올렸다.

만약 이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산음현 백성들은 살아갈 길이 없어, 세금을 피해 도망갈 것 같다는 민심도 보고서에 담았다. 그러나 조정의 입장은 굳건했다. 기존의 균등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평함’을 앞세우면서 만든 정책이다 보니, 조정에서는 동일한 가치를 가친 동일한 양의 목면으로 받는 게 편리했을 터였다. 2필을 1필로 줄여주었으니, 국가에서 실시하는 제도에 따라 ‘공평’하게 목면으로 납부하라는 어영청의 답변은 그래서 확고하기까지 했다.

이런 산음현 백성에게 영조의 근심 가득한 권농교서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지역 입장을 감안하지 않은 균역법에 낙심한 산음현 백성들에게 왕의 ‘근심’과 ‘시름’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산음현 백성들 입장에서 권농교서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시름’과 ‘근심’부터 살펴야 했던 이유이다. 정말 민생이 걱정된다면 ‘걱정된다는 말’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 걱정을 덜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