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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회의 기록자였던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한국의 독립영화, 그 중에서도 다큐멘터리는 특히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과 비주류 영역, 변방 공간에 주목해 왔다. 기록 작업의 특성과 독립영화의 초점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다.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의 효시로 인정되는 작품인 1988년 제작된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은 서울 올림픽 직전 환경정비사업 관련 일방적으로 쫓겨나게 된 서울 도시빈민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당시 주류 언론과 방송에서 누구도 소개하려 하지 않았던 이들이다. 또한 이들 도시빈민의 사정을 영화화하면서 그저 개인의 억울한 사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시민권이 인정되지 못하는 사회모순을 진단하는 통찰에 이르는 성과를 획득하는데 성공한 기념비적인 작업이다.
이후로도 독립 다큐멘터리는 그 역할을 꾸준히 수행해 왔다. 사회비판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더라도 소외된 사회 구성원과 영역에 주목하는 카메라의 힘은 당장은 튀어 보이는 것과 거리가 멀었지만 늘 사회변화와 역사의 기록자로서 묵직한 반향을 이끌어내 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한 <낮은 목소리> 연작 (1995-1999), 비 전향 장기수를 통해 남북 분단에 대해 환기하는 <송환> (2003), 용산 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 (2011) 등은 그저 극장 개봉성적으로만 측량할 수 없는 시대의 증언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독립영화의 성격과 범위가 모호해지면서 다큐멘터리 작업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21세기 들어 독립 다큐멘터리 대 방송 다큐멘터리 구도 등 여러 방식으로 장르 구분이 시도되었지만 그 경계는 나날이 애매해지는 실정이다. 다큐멘터리 분야에 국한된 혼란이 아니라 ‘독립영화란 무엇인가?’에 직결된 논의이기도 하다. 무엇으로부터 ‘독립’을 논하는지 지향에 대해 독립영화계 안에서도 이론이 분분한 상황이 지속되는 중이다. 다양한 형태로 뉴스와 정보를 접할 통로가 확장되었기에 굳이 과거의 대안언론적인 방법에 제한되지 말자는 태도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일종의 ‘청산주의’ 경향이 만만치 않은 건 우려해야 할 지점이다.
2010년대 이후 다양한 형식 실험과 타 문화예술 경향과의 융합, 관조적 태도 등이 독립 다큐멘터리에 두드러지고 있다. 새로운 시도가 활성화되는 건 당연히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어느새 상당수의 작가와 작업이 일종의 ‘거리두기’를 미덕으로 삼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여전히, 아니 훨씬 더 복잡하게 뒤엉킨 한국사회 모순과 한계를 기록하고 발언하는 작업의 유효수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건만(영원히 끝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한) 카메라를 든 기록자의 태도나 시선은 ‘쌈박’한 걸 쫓거나 자의식 과잉에 그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 독립영화라 불리지만 그 지향이 상업영화 예비군으로 흐르는 현실에선 오히려 자연스러운 귀결일 테다.
하지만 투박해 보일지언정 더 아래로, 더 가까이, 즉 ‘등잔 밑이 어두운’ 그 공간과 사람들에 착목하는 작업의 가치를 놓지 않는 작품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게 서울로 집중되고 나보다 더 잘나고 화려한 이들을 추종하는 걸 유행으로 따르는 주류 흐름과는 별개로 지역과 이웃들을 조명하는 그런 작업 결실들은 드물어지는 만큼 훨씬 더 소중해졌다. 물론 그런 부류의 작품들은 세련된 테크닉과 참신한 미학적 시도랑은 거리가 멀게 느껴지더라도 다른 각도에서 가치가 충분하지만, 열악한 조건에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 결실을 만나는 건 색다른 ‘발견’의 기쁨이 되곤 한다. <꽝>은 그런 작업 중 하나로 손색이 없다.
◆ 그야말로 등잔 밑을 비추는 기록 작업의 결실
단편 다큐멘터리 <꽝>은 얼핏 훑어만 본다면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전형적인 구성을 취한다. 하지만 찬찬히 살핀다면 그 속에 흥미로운 변주들과 흡입력 있는 캐릭터, 다층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소재로 속이 꽉 채워진 작품이다. 울산 울주군 언양읍 주민으로 살던 부부(아내 감독, 남편 PD 조합이다)는 다큐멘터리 제작 워크숍을 수료하는 와중에 자신들이 종종 미나리를 사던 길가 좌판을 떠올린다. 시골 도로가를 지나다 보면 종종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공간이다. 동네에 미나리 좌판이 몇 곳 있었지만 어느새 그 한곳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부부 공동작업으로 완성된 첫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 하나 남은 미나리 좌판 주인장 이정애 씨가 등장하게 된다.
30분 채 안 되는 다큐멘터리의 초반에는 미나리꽝을 재배하고 수확해 가공 판매하는 이정애 씨의 일상 스케치가 쭉 진행된다. 본격적인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 주인공의 캐릭터를 관객의 눈에 확립시켜놓으려는 방향으로 보인다. 작품 제목처럼, 마치 논처럼 물을 댄 습지에 가득한 물미나리 밭을 이르는 ‘꽝’에서 주인공은 홀로 묵묵하게 고단한 노동을 이어간다. 비가 오나 땡볕이 쏟아지나 그저 수십 년간 이어왔을 시간표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다. 장화를 신고 앞치마를 두른 채 주인공은 허리를 깊게 숙여 꼼꼼하게 미나리를 베어내고 한데 묶어 손질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수확한 미나리를 끌고 길거리 좌판에 운반해온다. 다시 물에 씻고 판매용으로 다듬는다. 그 와중에 좌판 앞을 오가는 동네 이웃과 인사를 나누며 안부를 교환한다.
그런데 주인공이 만나고 어울리는 대상은 동네 사람들만이 아니다. 무성하게 자라난 미나리꽝에는 우리네 논이 형성하는 것처럼 조그만 생태계가 존재한다. 풀숲에서 불쑥 고개를 내미는 건 어린 족제비와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다. 먹이를 잽싸게 채는 노랑부리 백로도 있다. 그 외에도 오리, 까치, 길고양이들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그중에도 마치 반려 견처럼 이정애 씨를 따르는 작은 백로가 유독 눈에 띈다. 미나리를 수확할 때 튀어나올 개구리 같은 먹잇감 때문에 늘 곁에 머문다고 한다. 사람은 심심하지 않고 새는 실속을 챙겨서 좋은 공생관계다.
◆ 보기 좋은 풍경을 넘어 ‘여자의 일생’을 기록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도시 근교의 소규모 자영농이 고단한 노동 과정을 거쳐 신선한 먹을거리를 공급하는 ‘체험, 삶의 현장’ 부류와 별반 다르지 않다. 대도시 거주자들은 체험하기 힘든 일상 풍경일, 미나리꽝을 중심으로 순환하는 생태계 속에서 고단하지만 목가적 삶을 영위하는 제법 근사한 풍경 기록으로 족하다. 하지만 중반을 경유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정애 씨와의 인터뷰가 진행되면 그 풍경은 숨겨둔 색채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다큐멘터리 전반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인공을 중심에 둔 미나리꽝 소우주가 전개되는데 비해, 중반부에선 좀 더 카메라가 간격을 줄이며 인물에 다가간다. 하지만 구도가 변하면서 전반과 대조되는 흐름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킨다. 카메라와 피사체 간 거리는 훨씬 좁혀졌지만 대신에 각도는 비틀린다. 화면에는 이정애 씨의 등 돌린 뒷모습이나 옆모습이 계속 잡힌다. 그런 화면을 배경으로 인터뷰 음성이 깔린다. 인터뷰 내용과 조응하듯 주인공의 일평생 노동에 의한 결과일 투박한 손과 상처 난 발이 클로즈업된다. 방송 다큐멘터리라면 재연배우를 써서 과장된 연출을 할 법도 하지만 이런 은근한 접근법이 오히려 주인공의 입으로 들려주는 삶을 상상하게 만드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렇게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활용하며 진행된 주인공과의 인터뷰는 구술사 형태를 차용해 지난했던 한 여성의 생애를 압축해 들려준다. 이정애 씨는 (사실상 납치 혼에 가까울 만큼) 원치 않는 결혼을 당했고, 남편의 사업실패로 시댁에 얹혀살면서 갖은 수모에 시달려야 했다.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희화화된 수준이 아니라) 시댁 식구들에게 수시로 손찌검당하기 일쑤였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남편은 아내를 보듬어주기는커녕 수시로 가정폭력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읜 처지라 딱히 의지할 곳도 없었고, 아들이 눈에 밟혀 차마 이혼을 감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무능한데다 폭행을 일삼던 남편과 시댁 식구들과 사실상 결별한 뒤 이정애 씨는 이십대 후반부터 온갖 품팔이를 해가며 자기 생계를 해결함은 물론 자녀까지 부양해야 했다. 남의 꽝에서 일하다 자기 꽝을 장만하기까지 이정애 씨는 날씨가 아무리 궂어도 눈만 뜨면 살아남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자동응답기 마냥 미나리꽝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다. 이제는 그럭저럭 자기 한 몸 건사하는데 성공했지만 아직도 옛날 일을 떠올릴 때마다 치를 떨며 시댁 식구들과는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주인공의 독백은 여성 잔혹사 그 자체다.
그런 험난했던 인생역정을 공개한 주인공은 어디서 듣고 배워서가 아닌 자신의 험난했던 체험을 근거로 삼아 지독히 현대적인 시각과 삶의 방식을 피력하는데 도달한다. 형편만 가능하고 돈만 번다면 결혼 같은 건 안할 거라는 다짐을 카메라에 전한다. 자신이 겪은 끔찍했던 과거 때문에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이정애 씨는 전심전력으로 미나리꽝을 지키고 장사에 고심한다. 마치 생사를 건 대결에 나서는 표정이다.
◆ 주인공의 도전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카메라의 힘
영화 후반이 되자 마치 주인공의 과거 수난을 묘사하듯 줄곧 뿌려대던 빗방울이 오랜만에 그친다. 햇살이 들기 시작하자 또 일하러 나간 주인공 주변에서 메뚜기 커플이 다정하게 짝짓기를 벌인다. 하지만 이정애 씨에겐 평생 허용되지 못했던 순간이리라. 끈덕지게 주인공을 관찰하던 제작진의 카메라는 그 인상적인 대비를 용케 포착해낸다. 해당 영화에는 유독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씬-스틸러’ 노릇을 톡톡히 해내는데, 이는 제작진의 동물적인 감각이라기 보단 성실함의 증명으로 비춰진다. 그만큼 동네 이웃에 대한 만든 이들의 배려가 돋보이는 결과물이다.
말미에 밤이 깊어만 가는데 천변 길을 뚜벅뚜벅 걷는 주인공의 뒷모습은 비장미까지 풍긴다. 마치 진모영 감독이 (국내 다큐멘터리 역대 흥행1위인)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다음으로 선보였던 다큐멘터리 <올드마린보이> 속에서 가족을 지키고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동해바다 속에서 해산물 채취 ‘머구리’ 일을 하는 탈북자 박명호 씨의 이미지를 겹쳐보이게 만드는 찰나다. 두 작품은 공히 한국 근현대사에서 오직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분투해야 하는 지난한 삶을 표상화한 데에서 통하는 구석이 있지만, <올드마린보이>가 사선을 넘고 남한에서 적응하기 위해 분투하는 가족 공동체가 온전히 유지되는 모델인데 비해 <꽝>은 주인공 이정애 씨가 온전히 단독자로서 우뚝 솟구치는 돌출로 차별화된다. 전자가 전통적인 가족의 순기능을 극대화해 보편적 공감대를 획득하는 반면, 후자는 그 가족의 해체에 가까운 귀결인 셈이다.
<꽝>을 감상하는 20여 분 시간은 오랜만에 제대로 독립영화 속 등장인물의 ‘등’이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는 광경을 접하던 순간이다. 수많은 독립영화감독들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문법에서 특화된 해당 작법이 정작 이 영화의 제작진들이 딱히 의도치 않았을 순간에 발휘되는 건 아마 대상과 인간에 대한 접근법의 유사함 때문일 테다. 이 단편 다큐멘터리는 농업과 환경의 중요성을 환기해내는 동시에 근현대 한국사회 여성인권의 한 단면을 자신의 동네에서 발굴하는 일정한 성취를 이뤄낸다. 어쩌면 바로 우리 곁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이들이 잔뜩 존재할지 모른다는,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다는 증명과도 같은 작업이다.
<작품정보>
꽝 Water Celery
2022|한국|다큐멘터리| 28분
감독 유소영
PD 김동진
촬영 유소영, 김동진
편집 유소영
출연 이정애
2022 3회 합천수려한영화제 우수상
2022 13회 부산평화영화제 단편 우수상
2022 24회 부산독립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2022 16회 상록수디지로그월드영화제 입상
2022 7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제작지원작
2022 23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