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살인사건을 대하는 조선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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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년 음력 2월 26일, 겨울의 삭풍이 따뜻한 봄볕으로 바뀌어도, 이를 즐길만한 조선 백성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따뜻한 봄볕은 보릿고개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삭주부사 노상추 역시 그 덕에 산창과 대관창, 남창을 돌며 환곡을 나누어 주는 일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처럼 바쁜 지방관 노상추에게 이보다 더 화급을 다투는 일이 발생했다. 살인사건이었다.

사건의 내용을 간략히 적은 고목에 따르면 삭주부 북면 송정리 아동 김세황과 읍내 향교에 속한 남자 종 장삼득의 아들 장천항이 동전 놀이를 하다 싸웠던 모양이다. 화가 난 장천항이 기왓장으로 김세황을 때렸고, 김세황은 한나절이 지난 신시(오후 3시~5시)에 죽었다. 동전 놀이를 하던 아이들의 감정싸움이 죽음을 불러온 것으로, 사람이 죽었으니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 살인사건은 그 보고가 조정에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지방관 입장에서는 반드시 절차에 따라 사건 처리를 해야 했다.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닌 이유이다.

살인사건 보고를 받은 지방관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검안이었다. 김세황의 시신은 고목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굴 전체에 특별한 상처는 없지만, 머리 살갗이 벗겨졌고 근처 뺨이 오목하게 함몰되어 있었다. 상처 길이는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갈 정도였고 넓이는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였다. 검시 지침서인 『무원록無冤錄』 내용을 살펴보니 구타당해 죽었을 때 발생하는 상처 형태였다. 유족을 대상으로 피해자 심문, 목격자들을 대상으로 한 심문이 이루어졌다. 행여 초기 보고와 다를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어 여러 증언들을 통해 검증했지만, 사건은 대낮에 아이들이 놀다가 일어난 싸움인지라 더 이상의 검증은 필요치 않았다. 노상추 입장에서는 살인사건의 처리 절차에 따라 이를 처리할 일만 남았다.

그러나 이 절차 역시 만만치 않다. 우선 그는 이웃 고을인 창성부昌城府에 파발을 보내 창성부사에게 복검을 요청했다. 복검이란 검시의 객관성 확보를 위해 초검관과 비슷한 지위에 있는 관료가 한 번 더 검시하는 것으로, 원래는 삭주부의 상위 기관인 평안도 관찰사가 명해야 했다. 그러나 검시의 효율성을 위해 가장 빨리 검시할 수 있는 옆 고을 수령에게 사건 담당 수령이 먼저 요청하고 그 사실을 관찰사에게 알리는 절차로 진행했다. 그리고 노상추는 자신의 검시와 1차 심문 등을 기반으로 검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살인사건 다음날, 창성부사의 복검이 진행되었다. 복검의 원칙에 따라 초검관인 노상추와 복검관인 창성부사는 만나지 않았고 사건 개요만 간단하게 전했다. 복검의 원칙은 사전 지식 없이 초검처럼 검시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조사를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외하고는 전달하지 않았다. 그 원칙 덕에 창성부사가 하인들을 32명이나 거느리고 와 거만하게 구는 꼴을 보지 않아 다행이기도 했다. 그러나 관례상 중형이 예상되는 피의자를 대상으로 심문할 때는 유사 직위에 있는 관료 두 명 이상이 함께 해야 한다는 동추의 원칙 때문에 싫어도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괜스레 창성부사의 심기를 건드려 텃세를 부리기라도 하면 사건 처리만 늦어지고, 심지어 조정에서 사람이 파견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사감(私感)을 접어야 했다.

사건의 정황에는 이견이 없었다. 피해자 가족의 공초 내용이나 목격자들의 심문 내용도 일치했다. 그리고 창성부사의 검시 내용 역시 노상추와 차이가 없었다. 원래 노상추의 검안이 올라가고 별도로 창성부사가 복검 결과를 올려 이를 평안감사가 복합적으로 판단하는 게 맞지만, 사건 자체가 분명해서 복검 결과까지 종합해서 검안을 작성했다. 기록에는 없지만, 피의자 장천항에 대한 심문도 있었을 것이다. 심문이 법적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창성부사와 함께 심문하는 동추 과정을 거쳤고, 노상추는 이를 기반으로 사건의 처결을 요구하는 보고서를 감영에 올렸다. 군현의 수령에게 주어진 처결권이라고 해야 태형 정도였기 때문에 살인사건에 대한 처분은 상부의 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죽은 사건이기 때문에 예상 가능한 형벌은 사형이었다. 이 사건이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은 아니지만, 우발적인 감정을 이기지 못해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다른 결과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예상외로 사건 처리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았다. 보통 사건 보고서에 큰 문제가 없으면 피의자에 대한 고복(재심문) 과정을 거쳐 피의자를 확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의자는 관찰사가 관할하는 감영으로 이송되고, 여기에서 조정의 명을 받아 최종 형벌이 집행된다. 사건 처리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지 않는 한, 고복 과정은 비교적 신속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과 회신이 늦을 이유는 없었다.

보름 뒤 사건 처리 회신이 내려왔다. 이 사건은 워낙 명시적이어서 사건 자체에는 이견이 없었던 듯하다. 다만 피의자 나이가 아직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성년이 이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처벌까지 함께 내려지면서 회신이 늦었던 듯했다. 장천항은 사형이지만, 나이가 차지 않아 사형에서 한 등급 감해 형을 적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한 등급 감한다고 해서 형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곤장 1백 대에 3천 리 이상 떨어진 곳으로 유배를 보내는 형은 사형과 큰 차이가 없었다. 5대 이상의 곤장만 해도 생명을 담보할 수 없는 데다, 곤장 백 대를 맞고 1,200km가 넘는 유배길을 가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미성년의 장천항에게 이는 사형보다 더 가혹한 길일 수도 있다.

억울한 죽음이 없게 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국가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당연히 억울한 죽음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제2의 억울한 죽음도 없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객관적이고 엄격한 형사 처리 절차이다. 조선은 적어도 드러난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이처럼 엄격한 절차를 적용했고, 이를 통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려고 노력했다. 국가가 사법 권력을 가져야 하는 당위 역시 여기에서 나온다. 사법 절차 자체가 백성들의 억울함을 만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원론적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