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권당이 권위를 얻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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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년 음력 2월 14일, 조선 최고 지성과 유학 이념을 상징했던 성균관과 사학(四學: 한양에 설치된 동서남북 학당) 유생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다음날 있을 전강(경서 강독을 권장하기 위해 왕이 친히 관할했던 시험)에 참여할 성균관 유생들 명부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표출되었다. 참여할 유생들 수가 너무 작아 이를 이상하게 여긴 임금이 그 연유를 물었기 때문이다. 당시 성균관과 사학의 몇몇 유생들은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이 쓴 『예기유편(禮記類編)』에 대한 배척 상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자 상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했고, 이들은 상소를 준비하는 이들에 의해 벌을 받았다. 그들의 이름이 전강 명단에서 빠진 이유였다.

『예기유편』은 최석정이 유교 경전인 『예기(禮記)』를 큰 틀에서 분류하고 그에 주석을 단 책이다. 유학은 도덕적인 마음(仁)이 행동으로 표출된 것을 예(禮)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덕적 마음은 볼 수 없지만, 예는 행동양식이나 복식 등을 통해 눈으로 볼 수 있으므로 후기 유학은 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예는 국가와 지역, 공동체와 가정 등의 상황과 관혼상제와 같이 의례적 행동이 필요한 상황이 만나는 지점에서 어떻게 충이나 효, 의로움, 믿음 등과 같은 유교 이념을 행동으로 표현할지 고민했다. 『예기』 이후 수많은 주석서가 나온 이유이며, 유학에 대한 입장과 이론에 따라 다양한 예학 이론서가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최석정의 『예기유편』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 집필되었다. 당연히 여기에는 최석정의 유학에 대한 기본 생각과 그것이 표출되어야 하는 상황,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규정한 주석과 해설이 담겼다. 그런데 이러한 주석과 해설은 유학에 대한 기본 생각이나 상황에 대한 차이에 따라 해석의 차이를 만들 수밖에 없다. 유교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다른 해석을 불러올 수도 있고, 현실 적용에 대한 복잡한 논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학문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너무나 당연하고, 또 그래야 한다. 이 때문에 최석정의 『예기유편』에 대한 성균관 유생들의 반발 역시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최석정의 유교 이해나 예학으로의 적용에 대한 학문적 입장에 반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 당시 최석정은 최고 권력인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다. 게다가 그가 쓴 『예기유편』은 1700년 교서관에서 관찬 되었고, 이를 수정해서 1707년 왕명으로 경상감영에서 다시 편찬되었다. 최석정의 유교 이해와 이를 예에 적용한 논리가 관찬을 통해 국가에서 받아들여졌다고 볼 수 있는 이유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성균관 유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소뿐이었을 수도 있다. 최석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권력을 활용하여 이를 막으려 할 수도 있었고, 이러한 이유에서 전강에 유생들의 참여가 저조한 책임 역시 최석정에게 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숙종이나 이 기록을 남긴 엄경수의 생각은 달랐다. 거기에도 이유가 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인해 오랫동안 대립했던 기호와 남인의 대립이 끝났다. 게다가 남인들이 정치적으로 지지했던 희빈 장씨의 죽음은 남인들을 중앙정계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켰다. 기호의 완벽한 승리였지만, 모든 승리한 권력이 그렇듯 이들은 남인에 대한 처리 등의 문제로 인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졌다. 최석정은 소론의 영수였고, 노론 입장에서는 사라진 남인과 달리 현재 바로 눈앞에 보이는 적이었다. 특히 조선의 붕당이 유학 이론이나 예에 대한 해석 차이 등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반대파에 대한 공격 역시 유학에 대한 해석이나 이론을 대상으로 했다. 숙종은 성균관 유생들의 『예기유편』에 대한 배척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군주 입장에서는 미래 인재들인 성균관 유생들마저 붕당에 휩쓸리는 게 보기 좋을 리 없었다. 상소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벌을 받는 유생들의 벌을 해제하도록 명을 내리면서, 동시에 상소에 참여하려 했던 유생들을 엄하게 꾸짖었다. 그러나 왕의 전교는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었다. 왕명을 받은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조태채가 성균관에 들어가 처벌 해제를 명하자, 재임齋任(성균관에 거하는 유생들의 임원) 김재로 등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후 아예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버렸다. 성균관 유생으로서 가진 특권과 장래까지 걸고 어떤 사안에 반대 의사를 표하는 권당(捲堂)이었다. 숙종 입장이 곤란해졌다. 일반적으로 권당은 국가의 미래 인재들이 순수한 유교 이념에 따라 현실 개혁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활용되었기 때문에, 성균관에서 유생들이 권당까지 하면서 반대하는 일에 대해서는 왕도 한 번 더 고민해야 했다.

성균관 유생들의 권당은 파장이 컸다. 이를 빌미로 노론 계열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조잡하고 얕은 소견으로 선유(先儒)들이 이미 이루어 놓은 글을 함부로 무너뜨렸다”라는 대사성 이민성의 비판은 『예기유편』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조선의 건국 이념인 주자학 기본 해석과 배치된다는 비판을 통해 최석정이야말로 조선 유학의 도를 흐리는 사문난적(斯文亂賊)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하는 이도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최석정을 감싸는 왕명을 핑계로 동반 파업을 했고, 기호 노론계 신하들은 이를 빌미로 소론의 영수인 최석정을 공격했다.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의 권당은 권위있는 일이었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젊은 인재들이 유학적 이념에 따라 행동하는 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올바른 권당은 조선 최고 교육기관에 속한 선비들이 권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실천의 한 방법이었다. 이 때문에 권당이 발생하면 왕은 예조판서를 보내 유생들의 입장을 듣고 필요한 경우 조정의 입장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번 권당에 대한 숙종의 입장은 명확했다. 숙종이 보기에 이 사태는 성균관 유생들마저 파당의 이익에 따르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권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이유였다. 권당의 권위는 성균관을 비우는 행동이 만드는 게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만든 이념이 순수한 선비들의 여론을 대표할 때만 가능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