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사람] 박재희, 변방의 장애 운동 뛰어든 활동가

대학 진학하며 장애운동 접한 박재희, 노동운동과 장애운동 사이에서 고민
故 김공대 사망 사건에 충격···경산에서 장애 운동가 길로
경북 곳곳 장애인 탈시설 운동 주도···변방의 탈시설·자립생활 운동 고민
활동가의 고강도 감정노동 주목···지역 여러 과중한 업무 도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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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희 활동가가 지난 3일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박 활동가를 기억하는 이들도 깊은 상심에 빠졌다. 그의 지인들은 장애 운동 체계가 갖춰 있지 않은 경북 지역 곳곳에서 체계의 빈틈을 박 활동가가 온몸으로 메꾸려 했다고 입을 모은다. 장애인 탈시설 당사자, 장애인 거주시설 공익신고자 등 그의 도움을 받았던 이들은 그의 활동이 사람을 향한 마음 깊은 애정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가 몸으로 채워야 했던 빈틈을 고민하지 않았던 지역사회의 반성도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학 진학하며 장애운동 접한 박재희
노동운동과 장애운동 사이에서 고민
故 김공대 사망 사건에 충격
경산에서 장애 운동가 길로

▲박재희 활동가가 지난 3월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박 활동가를 기억하는 이들도 깊은 상심에 빠졌다.

박재희 활동가는 대구에서 태어나 학내 장애 운동이 활성화된 대구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장애 운동을 접했다. 대학생 시절 그는 노동 운동과 장애 운동 사이에서 고민하며 지역 노동·장애 현안에 함께 했다. 그가 특별히 장애 운동에 더 마음을 쓰게 된 계기에는 故 김공대 씨 사망 사고가 있다.

故 김공대 씨는 경산 장애인 거주시설인 성락원에서 오래 거주하다 탈시설한 장애인 당사자다. 김 씨는 무연고로 어린 시절 성락원에 입소해 20여 년을 지낸 뒤, 2011년 지역사회로 나와 경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자립생활을 준비했다.  박 활동가의 친구 성빛나(33) 씨는 박 활동가가 경산 경상병원 정상화 투쟁 집회에 참석한 김 씨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는데, 이후 김 씨가 급작스럽게 사망해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당시 김 씨는 장애인 작업장에서 일하면서 한 달에 10만 원도 안 되는 급여를 받으면서, 급여를 모아 탈시설 해 야구장에 가는 게 꿈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김 씨는 교통사고로 급작스럽게 숨졌고, 그로부터 1년여 뒤 박 활동가는 김 씨가 탈시설하는데 창구가 되었던 경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학생 시절 재희는 임용시험은 애초에 고민하지 않았고, 진로로 노동 운동과 장애 운동에 모두 관심을 보이며 고민했어요. 2011년 희망버스 한진중공업 투쟁, 지역에서는 경상병원 투쟁에 연대하던 상황에서 김공대 소식을 들었고 그 소식에 재희가 크게 충격받은 것이 보였어요.” (성빛나)

박 활동가는 학생 시절에 장애 운동의 경험을 쌓았다. 2011년 대구장애인지역공동체 제안으로 질라라비 장애인 야학 교사로 활동을 시작했고, 2012년 전국유아특수교육과학생연대 의장으로서 장애인 교육권에 목소리를 냈다. 대구대 장애인권동아리 레츠에서도 활동했다.

당시 질라라비 야학 교사 활동은 조민제 장애인지역공동체 사무국장이 제안했다. 대학생 야학 교사는 활동가라기보다 자원봉사자에 가까운 개념이었는데, 박 활동가는 다른 대학생 야학 교사들보다 중증장애에 대한 편견이 없었고 그래서 중증장애인들과도 쉽게 인간관계를 형성했다. 야학 수업이 있는 날이면 동대구역 인근 야학 교실에 왔고, 수업을 마친 후에도 밤늦게까지 다른 활동 준비에 시간을 쏟기 일쑤였다.

너무 많은 일을 혼자 감당하는 그의 모습이 조 사무국장 눈에는 위태롭게도 보였다. 조 사무국장은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결정해야하는 시기에 있던 그에게 야학 상근 교사도 제안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어느날 경산에서 장애인 자립생활 운동을 해보겠다고 했다.

“경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2010년에 시작했는데, 성락원에서 탈시설한 분들 위주로 운영되던 곳이었고 당시 조직 형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곳이라 걱정됐어요. 개인적으로는 자생적 기반이 없는 곳에 젊은 활동가가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고, 주변적이고 부차적인 일이 많아 활동가로서 성장하기도 쉽지 않을 거 같았어요. 하지만 재희는 경산이 비교적 긴밀하게 연결된 사회라서 장애 사안과 노동 사안 모두 풀어나가 볼 수 있는 곳으로 판단하고 선택한 거 같았어요.” (조민제)

경북 곳곳 장애인 탈시설 운동 주도
기본적 장애인 인프라 부족한 경북에서
변방의 탈시설·자립생활 운동 고민

2013년, 박 활동가는 경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상근 활동을 시작했다. 탈시설한 장애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경산에서 자리를 잡아 갔다. 그 무렵 성락원을 나와 자립생활을 시작한 김유미(34) 씨는 센터 여러 실무를 처리하면서 자립한 장애인의 생활도 마음 깊이 신경 쓰는 사람으로 그를 기억한다.

“제가 막 탈시설 했을 때 재희 씨를 만났거든요. 재희 씨가 센터 일을 하면서도 저뿐만 아니라 다른 탈시설한 장애인들과도 잘 어울렸어요. 공부도 같이하고, 술도 같이 먹고. 자립 생활하면서 힘든 일은 없는지 신경을 많이 썼어요. 이번에 코로나 걸렸을 때 집까지 죽과 간식거리도 사다 주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을 텐데, 센터에서 재희 씨가 특별히 챙겨줬었어요. 저는 옆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로 크게 위로가 됐어요.” (김유미)

그는 센터 활동 초기부터 장애 운동 불모지인 경북에서 여러 활동을 고민했다. 2013년 12월, 그는 김용식 경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사(당시 민주노총 경북본부 사무처장)를 찾아갔다. 경북도청을 상대로 장애인 이동권과 자립생활 권리를 쟁취하려는 투쟁을 준비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3선에 도전할 김관용 당시 도지사를 상대로 장애인 생존권 쟁취에 나서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2014년 장애인차별철페의날(4월 20일, 장애인의 날) 즈음부터 지방선거가 예정된 6월까지 이어진 투쟁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김관용 도지사 후보가 탈시설 등 정책요구안에 합의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박재희 활동가와 경산센터 활동가, 경북 지역 장애인 부모회가 연결됐고,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도 결합하면서 판이 커졌다고 김 이사는 설명했다.

이후에도 박 활동가는 경북 곳곳의 장애인 거주시설 인권침해 문제, 장애 아동 학대 사건 등을 해결하기 위해 피해자 소통, 민원 제기, 정책 마련 등에 앞장섰다. 지속적 문제제기에 일부 장애인 거주시설은 폐쇄됐고, 그는 폐쇄 후 거주 장애인 탈시설 등 대책 마련에도 힘썼다.

경주 푸른마을 관리자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 경주 혜강행복한집 거주인 폭행·회계 비리 사건, 포항 다원생활가정 장애아동 학대 사건, 포항 사회복지법인 우리공동체 시설장 거주인 성추행 사건, 영덕사랑마을 장애인 학대 사건, 영천팔레스 거주인 학대·성폭력 사건, 안동시 선산재활원 장애인 폭행·횡령 사건, 칠곡 밀알사랑의집 장애인 학대·성폭력 사건, 경산 성락원 장애인 물고문 등 학대 의혹 사건에서 그는 대부분 가해자 처벌을 이끌어냈고, 공익신고자 보호, 피해자 보호 대책 마련에도 노력했다.

그의 지역 장애 운동에 대한 고민은 지난 3월 진행된 한 연구기관과 인터뷰에 담겨 있다. 그는 해당 인터뷰에서 23개 시·군으로 나뉜 경상북도에서 탈시설, 활동지원 수급 불안정, 사회서비스원 등 총괄 기관 부재 문제가 있다며 공공 영역의 탈시설·자립생활 지원 책임 강화 필요성 등을 주장했다.

활동가의 고강도 감정노동 주목
지역 여러 과중한 업무 도맡아

의욕에 차 많은 활동을 감당했던 그였던 만큼, 급작스러운 그의 부고는 지역 사회 활동에 여러 빈틈을 노출시킨다. 경북 한 장애인 시설에서 근무하다 시설 비리를 고발한 공익신고자이자 사회복지사인 A(45) 씨는 과중한 업무를 맡은 활동가를 돌보는 일도 고민해야 한다고 짚는다. A 씨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박 활동가로부터 많은 도움과 위로를 받았다는 점을 상기했다.

“학연, 지연 섞인 지역에서 내부고발한다는 게 쉽지 않거든요. 하지만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에서 학대 사건을 고발했어요. 내부고발자 전원이 해고됐죠. 박재희 씨는 해고된 후 알게 됐는데 저희가 정말 힘든 상황에서 큰 위로를 받았어요. 문제해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동안 저희가 힘들 때면 경산에서 먼 이곳까지 와서 위로해 주고 갔어요. 시청에도 문제 해결 압박하러 여러 차례 오갔어요. 공익신고자분들이 잘 될 수 있도록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약속도 했는데, 저더러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의미였던 거 같아요. 저희 힘든 얘기만 할 줄 알았지, 그 사람이 힘들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밤이든 낮이든 전화하면 일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감정노동과 업무량을 예전에는 생각을 못 했어요.” (A 씨)

신장 장애를 이유로 회사에서 해고됐다가 투쟁 끝에 복직한 강성운(45) 씨도 활동가의 감정노동에 대해 언급했다.

“해고되고 지방노동위, 중앙노동위 모두 졌거든요. 막막하고 사는 게 힘들고, 신장 관리에 돈은 돈대로 들어서 어려웠는데, 박재희 활동가를 만나서 변호사와 연결이 됐고 소송을 해볼 마음을 먹었어요. 포기하고 싶었는데 그 활동가가 중간에서 제 사정을 잘 들어줬거든요. 마음으로 위로를 해주니, 위안도 되고, 용기도 났어요. 신장 장애에 대해 이해를 못 하면 보통은 일하기 어려운 거 아니냐고들 하는데, 박재희 활동가는 이해도도 높고 무조건 제 편이었어요.” (강성운)

활동의 기반이 넉넉하지 않았던 만큼 그가 겪는 어려움은 감정적인 것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장애인 자립생활 지원 과정에서 불거지는 여러 문제를 푸는데 ‘사적인’ 시간과 노력을 더했다. 사적인 시간과 노력이란 그가 속한 경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차원에서 논의되지 않은 채 그가 개인적으로 일을 담당한 사례를 의미한다. 그는 센터 업무 뿐 아니라, 경산 지역 몇 안되는 청년 활동가로서 겪는 업무 쏠림이나 비장애인 활동가로서 느끼는 한계도 주변에 털어놓곤 했다.

“작년 모 시설 문제로 경북 타지역에서 회의를 했었는데, 그 지역에서 박 활동가를 포함해 논의해 놓고 밖에서는 재희 씨를 빼고 일을 진행하기에 항의한 적이 있거든요. 그날 재희 씨와 경산에 와서 이야기를 깊게 했는데, 일상적인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쓰임이 있을 때만 연락 받는 사람이었다고. 도구적인 역할에 머무는게 힘들다고 했어요. 그날 그 외 본인이 고립되는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했고, 지역 막내 활동가다 보니 다른 단체에서 이런저런 일을 부탁하는 문제도 이야기했어요.

다양한 문제가 누적된 상태에서, 최근에 센터에서 여러 문제가 생겼어요. ··· 재희 씨가 마지막까지 했던 업무가 정신장애인 지원이었어요. 그분 주거지 문제가 생겼고 시에서는 행정 입원을 시키려 했는데 재희 씨가 계속 반대했거든요. 집주인이 나가라고 해서 다른 주택이라도 알아보던 중이었어요. 이 일을 센터 지원 없이 개인적으로 했어요. 아주 총체적인 문제이고, 저를 포함한 주변 모든 사람이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문제예요. 누군가를 악마화해선 안 될 거예요.” (김용식)

박 활동가는 부족한 자원 속에서도 지역에 맞는 장애 운동을 꾸준히 고민하는 활동가였다. 활동상 어려운 점에 대해서는 가까운 일부 지인에게 가끔 언급한 적 있지만, 공론화하기보다는 혼자 감당하려 했다는 것이 주변인들의 설명이다. 그가 떠난 뒤, 그가 몸담았던 운동이나 조직 차원의 성찰도 요구된다. 그의 배우자 최상훈 씨의 말이다.

“재희는 지역에서 있었던 여러 시설 문제를 해결했을 때 크게 기뻐했어요. ··· 경북 23개 시·군 거의 모든 곳에서 일이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 일 모두 하나하나 도맡기에, 저는 과연 그렇게 하나하나 다 할 수 있는 일인지, 역량 밖의 일이 아니냐고 자주 얘기했어요. 차라리 경북도를 상대로 투쟁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는데 재희는 공감하면서도 조직이 그만한 역량이 없다고 했어요. 재희는 이제 없고, 앞으로 누군가가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될 텐데 사람이 소진되는 방식이 아닌 대안을 고민해야 할 거예요.” (최상훈)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